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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DONG-EUN · 세계관설계자 (15편)

세계의 유형 4, SF와 미래

김동은WhtDrgon. · 8편

8편. 세계의 유형 4, SF와 미래

부품 창고의 다음 구역은 미래의 선반이다. SF는 유형론에서 가장 넓고 가장 오해가 많은 영역이다. 우주선이 나오면 SF라는 소박한 분류부터 과학적 정확성이 SF의 자격이라는 엄격한 분류까지, 경계선에 대한 논쟁이 그치지 않는다. 8편의 관통 질문은 이것이다: 미래의 세계는 무엇으로 성립하는가. 성립의 원리를 먼저 확정하고, 그 원리로 하위 유형들을 차례로 연다.

1. SF: 사변의 문법

SF는 사이언스 픽션science fiction의 약자이지만, 본질은 과학 소설이라는 번역보다 사변 소설speculative fiction이라는 별칭에 가깝다. 사변은 만약이라는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는 사고 실험이다. 만약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만약 기계가 생각한다면, 만약 자원이 무한하다면. SF는 이 가정 하나를 세계에 투입하고, 그 파장이 사회와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논리적으로 추적하는 장르다. 대체역사의 설계 문법과 구조가 같다는 점을 눈치챘을 것이다. 분기점 하나를 정하고 이후를 인과로 굴리는 기술이, 과거 대신 가정에 적용된 것이 SF다. 두 장르의 설계자가 서로의 문서 양식을 빌려 쓸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차이는 검증자의 부재다. 역사는 기록이 심사하지만 가정의 귀결은 논리만이 심사한다. 그래서 SF 세계관의 품질은 소재의 신기함이 아니라 추적의 성실함에서 갈린다. 순간이동이라는 소재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이동이 있는 세계의 국경과 교도소와 부동산이 어떻게 되는지를 끝까지 계산했는가가 전부다. 명작 SF들은 소재의 목록이 아니라 계산의 깊이로 기억된다. 설계 시사점은 명확하다. SF 세계관 문서의 중심은 설정 목록이 아니라 파급 계산서다. 투입한 가정마다 사회 각 분야로의 연쇄를 기록한 표가 이 유형의 핵심 산출물이다. 백동화의 연쇄가 가정의 연쇄로 바뀌었을 뿐, 파고드는 공정은 같다.

2. SF와 판타지의 경계: 소재의 권위

사변이라는 문법은 판타지에도 있다. 만약 마법이 있다면 역시 사고 실험이다. 그렇다면 SF와 판타지는 무엇으로 갈리는가. 소재의 외형은 기준이 되지 못한다. 같은 순간이동이 마법진으로 구현되면 판타지, 양자 전송 장치로 구현되면 SF로 불린다. 현상은 동일한데 분류가 갈리는 것이다. 갈리는 지점은 소재가 기대는 권위의 출처다. 나는 이것을 소재의 권위라고 부른다. SF의 소재는 과학의 권위에 기댄다. 실제 과학이 아니어도 좋다. 과학의 형식, 곧 법칙과 측정과 재현 가능성의 언어로 말하기만 하면 소재는 과학의 신용을 대출받는다. 워프 항법의 방정식이 실재하는지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 방정식이 있다는 태도가 심사를 통과시킨다. 판타지의 소재는 다른 은행을 쓴다. 신화와 전승과 초월의 권위다. 마법이 정당한 것은 측정되어서가 아니라 오래된 질서에 속해 있어서다. 주문이 라틴어와 고어를 닮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래됨 자체가 이 은행의 담보이기 때문이다. 엑소시즘이 종교의 권위를 빌리던 구조가 장르 전체 규모로 확장된 것이라 보면 된다. 이 관점의 실무 가치는 판별이 아니라 설계에 있다. 세계의 소재들이 어느 권위에 기대는지를 통일하는 것이 장르 감각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한 세계 안에서 권위의 출처가 무단으로 섞이면 독자는 정체불명의 위화감을 느낀다. 마법사가 갑자기 주문의 출력값을 측정하기 시작하면 세계의 결이 흔들리는 식이다. 섞으려면 장르 융합의 절차, 곧 우선권 판정이 필요하다.

3. 과학적 개연성: SF의 허락 조건

권위의 출처가 과학이라는 말은 SF의 허락 조건을 정확히 규정해준다. 독자가 SF에 요구하는 것은 과학적 사실성이 아니라 과학적 개연성이다. 초광속 항행은 현재 물리학이 부정하지만 SF의 표준 설정이다. 독자가 심사하는 것은 가능한가가 아니라 과학처럼 굴러가는가이다. 조건은 셋으로 정리된다. 첫째, 법칙성이다. 기술은 일관된 규칙을 따라야 하며, 어제 안 되던 것이 오늘 설명 없이 되면 안 된다. 둘째, 대가성이다. 모든 기술에는 에너지든 부작용이든 비용이 있어야 한다. 공짜 기적은 과학의 언어를 쓰는 순간 사기로 심사된다. 무한 동력을 선언한 세계는 그 순간부터 에너지 관련 갈등 전부를 잃는다는 대가도 치른다. 셋째, 한계성이다. 기술이 못 하는 일의 목록이 있어야 한다. 전능한 기술은 기계장치의 신의 상시 대기 상태와 같다. 못 하는 일의 목록이 곧 이야기가 발생할 자리의 목록이다. 이 세 조건은 하드 SF와 소프트 SF의 구분에도 답을 준다. 구분의 실체는 과학적 정확도의 차이가 아니라 세 조건을 준수하는 엄격도의 차이다. 설계 시사점은 기술 명세의 표준화다. 세계의 주요 기술마다 원리의 설명 깊이, 비용, 한계를 같은 양식으로 등재한다. 원리는 한 줄이어도 좋으나 비용과 한계는 비워둘 수 없다. 원리는 세계를 위한 항목이고 비용과 한계는 이야기를 위한 항목이기 때문이다. 이 양식이 게임세계의 시스템 명세서와 같은 역할을 SF에서 수행한다.

4. 미래: 현재의 연장인가 단절인가

성립 원리를 갖췄으니 시제 다이얼을 미래로 돌린다. 미래를 무대로 삼는 세계의 첫 설계 결정은 연장이냐 단절이냐다. 연장형 미래는 현재에서 출발해 도달 가능한 미래다. 지금의 기술과 사회 문제가 몇 십 년 진행된 세계로, 근미래물이 여기 속한다. 단절형 미래는 현재와의 연결이 끊긴 미래다. 수백 년 뒤, 성간 문명, 혹은 대격변 이후의 세계로, 사실상 이세계에 가까운 자유를 가진다. 두 형태는 비용 구조가 반대다. 연장형은 설명 비용이 싸다. 독자가 아는 현재가 출발점이라 변화분만 가르치면 된다. 대신 검증 비용이 비싸다. 현재를 아는 모든 독자가 그 연장의 타당성을 심사하고, 몇 년만 지나도 예측이 낡는 시효 문제까지 안는다. 근미래물의 유통기한은 유형론 전체에서 가장 짧다. 단절형은 반대로 검증에서 자유롭되 세계 전체를 처음부터 가르쳐야 한다. 진입 장벽을 낮추기 위해 단절형이 흔히 쓰는 장치가 현대인의 시점, 곧 냉동 수면자와 이주자다. 설계 시사점은 연장형의 연표 작성법이다. 현재에서 작중 시점까지의 중간 연표, 곧 무엇이 언제 어떤 계기로 변했는지의 기록이 연장형 미래의 핵심 문서다. 이 연표가 부실하면 미래는 현재에 소품만 얹은 세계로 심사된다. 하늘을 나는 차 아래로 지금과 똑같은 사회가 굴러가는 세계는 그 부실의 전형이다. 대체역사의 개변 연표와 같은 문서를 방향만 바꿔 미래로 굴리는 것이라 보면 정확하다.

5. 우주: 무대의 극한

미래의 무대를 끝까지 넓히면 우주가 된다. 우주를 무대로 삼는 순간 세계관은 물리량과 싸우게 된다. 거리와 시간이다. 별과 별 사이는 빛으로도 몇 년이 걸리고, 이 사실은 이야기의 기본 동작들을 전부 방해한다. 소식을 전할 수 없고, 구조하러 갈 수 없고, 제국을 통치할 수 없다. 지구의 서사 문법 대부분이 즉시성의 가정 위에 서 있었음이 우주에서 드러난다. 그래서 우주물의 세계 설계는 사실상 이 물리량의 처리 방식 선택이다. 선택지는 셋이다. 첫째, 물리를 우회하는 길이다. 초광속 항행과 통신을 도입하면 우주는 사실상 바다가 되고, 대항해 시대의 문법이 이식된다. 스페이스 오페라가 이 길 위에 있다. 둘째, 물리를 준수하는 길이다. 광속 제한을 받아들이면 시간 지연과 세대 우주선과 편도 항해가 세계의 조건이 되고, 거리 자체가 비극의 재료가 된다. 셋째, 무대를 좁히는 길이다. 태양계 안, 정거장 하나, 함선 한 척으로 범위를 줄이면 우주는 작은 세계의 문법으로 돌아온다. 밀폐된 함선은 우주에 띄운 가정이자 회사다. 실제로 함선물의 태반은 작은 세계의 문법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설계 시사점은 첫 결정의 고지 의무다. 항행과 통신의 속도 규칙은 우주 세계의 헌법이라서 최우선으로 확정하고 조기에 제시해야 한다. 이 규칙이 흔들리면 우주의 크기 자체가 흔들린다. 통신은 즉시인데 항행은 몇 달인 세계라면 그 비대칭이 낳을 사회상까지 계산되어 있어야 한다.

6. 거대로봇: 기술이 신화가 되는 지점

우주 시대의 일본이 만든 고유 선반이 거대로봇물이다. 사람이 탑승하는 거대 인간형 병기라는 소재는 냉정한 군사 논리로는 정당화가 어렵다. 그런데도 이 유형이 반세기를 살아남은 것은, 로봇이 병기가 아니라 다른 무엇의 그릇이기 때문이다. 거대로봇은 기술의 외형을 한 신화적 존재다. 소년이 탑승하는 것은 조종석이 아니라 아버지의 유산이고, 기동하는 것은 병기가 아니라 성인식이다. 신의 갑주를 입는 영웅 서사가 과학의 권위로 번역된 형태이며, 소재의 권위가 이중으로 걸린 특이 사례다. 공학의 언어로 말하지만 신화의 인과로 움직이는 존재인 것이다. 이 이중성이 설계의 초점을 정해준다. 거대로봇 세계에서 정합성이 요구되는 곳은 로봇의 공학이 아니라 로봇의 지위다. 왜 소년만 탈 수 있는가, 로봇은 사회에서 무엇으로 취급되는가, 적은 왜 같은 규격으로 싸워주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 곧 탑승 자격과 존재 이유의 설정이 공학 고증보다 우선한다. 관절 구동 방식의 논쟁은 탑승 자격의 설정이 선 다음의 일이다. 시사점은 상징 설계의 명문화다. 이 로봇이 세계 안에서 상징하는 것과 그 상징을 지탱하는 규칙을 문서의 첫 장에 둔다. 상징이 확정되면 디자인과 전투 규칙과 적의 규격이 전부 그로부터 역산된다. 상징 없이 스펙만 있는 로봇은 큰 중장비일 뿐이다. 장르사에 남은 기체들은 성능이 아니라 의미로 기억된다.

7. 이능력배틀물: 능력 체계의 설계

신화적 힘을 개인에게 나눠주면 이능력배틀물이 된다. 저마다 고유한 초능력을 가진 인물들이 능력을 겨루는 유형으로, 일본 소년만화가 규격을 다듬었고 한국 웹소설과 웹툰의 주력 수출품이기도 하다. 이 유형의 세계관은 곧 능력 체계다. 능력이 어떻게 발생하고, 어떤 분류를 가지며, 무엇으로 우열이 갈리는지의 시스템이 세계 그 자체다. 잘 설계된 체계의 공통점은 강함의 원천이 출력이 아니라 운용에 있다는 것이다. 순수 출력 서열은 만들기 쉽지만 이야기를 죽인다. 서열표가 곧 승패표가 되어 싸움 전에 결과가 읽히기 때문이다. 전투력 수치의 인플레가 장르를 몇 번이나 망가뜨린 전례가 그 증거다. 검증된 해법은 제약과 상성이다. 강한 능력일수록 무거운 조건을 달고, 능력 간에 가위바위보의 관계를 심으면, 승부는 출력 비교에서 조건 활용의 두뇌전으로 바뀐다. 약한 능력의 의외의 승리라는 이 유형 최고의 상품이 그 구조에서만 나온다. 제약이 재미의 원천이라는 이 역설이 유형의 핵심 원리다. 시사점은 능력 등재 양식의 설계다. 능력마다 효과, 발동 조건, 제약, 상성을 필수 항목으로 등재하고, 신규 능력은 기존 능력 전부와의 대전 결과를 검산한 뒤 승인한다. 게임 밸런싱과 동일한 공정이며, 실제로 이 유형의 세계관 관리는 설정 관리라기보다 라이브 게임 운영에 가깝다. 신능력 하나가 패치 하나이고, 검산 없는 패치는 밸런스 붕괴로 직행한다.

8. 유토피아: 완성된 세계의 함정

능력이 아니라 사회를 사변의 대상으로 삼는 계보가 있다. 그 첫 항이 유토피아utopia다. 토머스 모어가 만든 이 말은 좋은 곳과 없는 곳이라는 두 그리스어를 겹쳐 놓은 언어유희로, 이상 사회를 그리는 유형을 가리킨다. 세계관 작업의 눈으로 보면 유토피아는 역설적인 난제다. 완성된 사회에는 결핍이 없고, 결핍이 없으면 갈등이 없고, 갈등이 없으면 이야기가 없다. 그래서 순수한 유토피아 서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실제 작품들은 대부분 유토피아의 심사가 된다. 이 완성은 진짜인가, 완성의 비용은 누가 내는가, 완성을 유지하는 힘은 무엇인가. 답을 추적하면 대개 관리와 감시와 배제가 나오고, 유토피아는 안쪽에서부터 디스토피아로 반전된다. 문 밖에 버려지는 자가 있어야 유지되는 낙원이라는 구도가 이 계보의 오래된 심장이다. 완성의 선언 자체가 결함의 은폐라는 이 구조가 유형의 표준 문법이다. 설계 시사점은 이중 장부의 작성이다. 유토피아 세계는 공식 설정과 실제 설정의 두 겹으로 짓는다. 주민에게 공표된 세계의 모습과 실제로 작동하는 세계의 구조를 별도 문서로 만들고, 둘의 간격 목록을 관리한다. 그 간격들이 곧 이야기의 진입로이며, 주인공은 대개 간격 하나를 밟고 세계의 이면으로 떨어지는 인물이다. 간격의 위치 선정이 곧 플롯의 설계가 된다.

9. 디스토피아: 고장난 세계의 문법

간격을 감출 필요조차 없어진 세계가 디스토피아dystopia다. 유토피아의 반의어로, 나쁜 상태가 사회 전체로 완성된 세계를 가리킨다. 전체주의의 감시 사회, 계급이 생물학적으로 고정된 사회, 사고가 언어 단위에서 통제되는 사회가 고전적 표본들이다. 디스토피아 설계의 핵심 원리는 단일 가치의 전제화다. 안전, 효율, 평등, 행복 같은 그 자체로 선한 가치 하나가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할 권한을 얻으면 디스토피아가 성립한다. 이 원리가 이 유형을 값싼 악당 세계와 구분해준다. 좋은 디스토피아의 지배 체제는 악의가 아니라 논리로 굴러가며, 그 논리는 일부분 옳아서 반박이 어렵다. 독자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세계의 잔혹함이 아니라 세계의 그럴듯함이다. 우리 사회가 반 발짝만 미끄러지면 도달할 곳이라는 감각이 이 유형의 힘이다. 설계 시사점은 체제 옹호론의 선행 집필이다. 이 세계의 지배 체제가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논리를 먼저, 성실하게, 반박하기 어렵게 써본다. 그 문서가 설득력이 있어야 세계가 선다. 그다음에 체제의 비용 목록, 곧 그 논리가 무엇을 대가로 지불했는지를 작성한다. 통제의 기술적 수단, 저항의 존재 형태, 체제의 유지 장치까지 갖추면 디스토피아의 스펙이 완성된다. 억압의 강도가 아니라 정당화의 완성도가 이 유형의 품질이다.

10. 포스트 아포칼립스: 끝난 뒤의 세계

사회 사변의 마지막 항은 사회가 무너진 뒤를 다룬다.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는 문명의 붕괴 이후를 무대로 삼는 유형이다. 핵전쟁, 역병, 기후 재앙, 그 무엇이든 세계를 끝낸 사건이 있었고, 이야기는 그 잿더미에서 시작한다. 이 유형의 설계는 세 개의 층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층은 붕괴의 사양이다. 무엇이 언제 어떻게 무너졌는지가 남은 세계의 모든 조건을 결정한다. 역병의 세계에는 건물이 남고, 핵의 세계에는 땅이 죽는다. 둘째 층은 잔존물의 목록이다. 무엇이 살아남았는가. 남은 기술, 남은 기록, 남은 제도의 파편이 이 세계의 자원 지도이며, 구시대의 유물이 신화의 지위를 얻는 과정이 이 유형 고유의 정취를 만든다. 셋째 층은 신질서의 맹아다. 폐허에도 사람이 모이면 규칙이 자라고, 이 유형의 실제 주제는 대개 파괴가 아니라 이 재건이다. 어떤 질서가 다시 서는가, 옛 세계의 실수는 반복되는가. 시사점은 붕괴 이전 세계의 설계 의무다. 무너진 세계를 그리려면 무너지기 전의 세계가 먼저 문서로 존재해야 한다. 잔해는 원형의 그림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유형의 붕괴 원인 목록 맨 앞에는 오랫동안 한 항목이 놓여 있다. 걸어 다니는 재난, 다음 편의 첫 손님인 좀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