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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DONG-EUN · 세계관설계자 (15편)

키워드론

김동은WhtDrgon. · 11편

11편. 키워드론

작업 사이클의 첫 동작, 추출로 들어간다. 추출의 기술을 다루려면 먼저 무엇을 추출하는가부터 확정해야 한다. 답은 키워드다. 11편의 관통 질문은 이것이다: 세계는 왜 키워드로 다뤄지는가. 문장이 아니라 단어, 서사가 아니라 항목이 설계의 단위가 되는 이유를 밝히고, 키워드라는 재료의 성질과 종류와 다루는 법을 차례로 정리한다.

1. 키워드: 설계의 최소 단위

키워드는 세계를 이루는 항목 하나하나를 부르는 이름이자, 설계 작업의 최소 단위다. 백동화, 강호, 은폐 기제, 통금. 세계관 문서의 실체는 이런 키워드들의 목록과 각 키워드에 달린 설명이다. 왜 단위가 문장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키워드인가. 이유는 관리의 요구에 있다. 산출물 규격의 다섯 조건을 떠올리면 답이 보인다. 검색되려면 표제가 있어야 하고, 인용되려면 항목이 잘려 있어야 하고, 추적되려면 개정의 단위가 있어야 한다. 키워드는 이 셋을 동시에 만족하는 유일한 크기다. 문장은 검색의 단위로 너무 잘고, 이야기는 개정의 단위로 너무 크다. 백과사전이 문장이 아니라 표제어로 조직되는 것과 같은 이유다. 키워드 단위의 또 다른 효능은 재사용이다. 이야기에 녹아 있는 설정은 그 이야기와 함께만 움직이지만, 키워드로 잘린 설정은 다른 이야기에 독립적으로 투입될 수 있다. 세계관이 작품들 사이의 공통 기반이 되려면 기반의 알갱이가 작품보다 작아야 하는 것이다. 조립의 비유가 정확하다. 완성품은 조립을 견디지 못하지만 부품은 조립을 위해 존재한다. 시사점은 사고의 단위 전환이다. 설계자는 세계를 이야기로 상상하되 키워드로 기록하는 사람이며, 이 이중의 감각이 직무 기술의 바탕이다. 상상만 하는 사람은 작가에 머물고, 기록만 하는 사람은 서기에 머문다.

2. 사물화와 객체화: 무형을 객체로 다루는 기술

키워드 단위의 기록에는 전제가 하나 있다. 세계의 구성물이 잘라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전제다. 칼과 성은 원래 잘려 있지만, 세계의 절반은 형태가 없다. 분위기, 정서, 관계, 긴장, 어떤 시대의 공기. 무형의 것들을 다루는 기술이 사물화와 객체화다. 객체화objectification는 무형의 무엇에 이름을 붙여 하나의 객체로 만드는 조작이다. 두 가문 사이의 오래된 미움은 잡을 수 없지만, 그것에 북부 혈원血怨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등재 가능한 항목이 된다. 이름이 붙으면 설명이 달릴 수 있고, 설명이 달리면 검색과 인용과 개정이 가능해진다. 프로그래밍이 데이터와 동작을 객체로 묶어 다루듯, 설계는 정서와 내력을 키워드로 묶어 다룬다. 사물화는 객체화의 강화형으로, 무형의 것에 물리적 실체를 부여하는 조작이다. 혈원을 서약의 단검이라는 사물에 실으면, 미움은 이제 장면에 등장하고 도난당하고 부러질 수 있는 것이 된다. 무형이 사물의 운명을 얻는 것이다. 상징 소품의 설계가 바로 이 기술이며, 가정 세계에서 내력이 사물에 실리던 원리의 일반화다. 시사점은 무형 자산의 목록화다. 세계의 정서적 핵심일수록 무형이기 쉬우므로, 의식적으로 객체화하지 않으면 문서에서 누락된다. 분위기까지 키워드가 되어야 분위기가 관리된다. 이 세계 특유의 쓸쓸함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 항목으로 적을 수 있을 때, 그 쓸쓸함은 파생작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

3. 유형과 무형: 무엇이 등재 가능한가

객체화의 기술을 갖추면 등재 가능성의 지도를 그릴 수 있다. 세계의 구성물을 유형과 무형의 스펙트럼에 놓고, 각각의 기록 방식을 정하는 것이다. 스펙트럼의 한끝에 유형물이 있다. 사물, 장소, 인물처럼 형태와 위치를 가진 것들로, 사양의 언어로 기록된다. 크기, 재질, 소재지, 소유자. 데이터시트에 가장 잘 담기는 부류다. 중간에 제도와 규칙이 있다. 법, 관습, 조직, 의례처럼 형태는 없으나 조항으로 진술되는 것들로, 조문의 언어로 기록된다. 명예 규정집과 감염 수칙 시트가 여기 속했다. 다른 끝에 순수 무형이 있다. 정서, 분위기, 관계의 질감처럼 진술 자체가 어려운 것들로, 객체화를 거쳐 정의와 사례의 언어로 기록된다. 이것이 무엇인지의 정의문에, 이것이 드러난 장면의 사례 목록을 붙이는 방식이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태도 시트가 그 표본이었다. 이 지도의 요점은 무형 쪽으로 갈수록 기록 불가가 아니라 기록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전승되지 않고, 전승되지 않는 것은 담당자와 함께 사라진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증발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무형인 것들이다. 시사점은 기록 양식의 삼원화다. 세계관 문서 체계에 사양형, 조문형, 정의사례형의 세 양식을 마련해두면, 세계의 어떤 성분이 와도 받아 적을 그릇이 있다. 그릇이 준비된 조직과 매번 양식을 고민하는 조직은 축적의 속도가 다르다.

4. 클리셰: 낡음이 아니라 자산

이제 재료의 종류로 넘어간다. 추출의 현장에서 가장 자주 건져 올리게 되는 것은 놀랍게도 새것이 아니라 헌것, 클리셰cliché다. 클리셰는 오래 반복되어 닳은 표현이나 설정을 가리키는 말로, 창작론에서는 대개 기피 대상으로 가르친다. 설계자의 대차대조표에서는 계정이 다르다. 클리셰는 낡음이 아니라 검증된 합의 자산이다. 반복되었다는 것은 수요가 증명되었다는 뜻이고, 닳았다는 것은 독자 전원이 이미 안다는 뜻이다. 이미 안다는 것의 값어치는 유형론 내내 확인했다. 중세 판타지의 표준어가 설명 비용을 지웠고, 유형의 이름 하나가 전제의 절반을 계약했다. 그 경제의 최소 단위가 클리셰다. 흑막인 재상, 시골 출신의 용사, 마지막에 배신하는 동료. 각각이 설명 비용 제로로 투입 가능한 기성 부품이다. 문제는 클리셰 자체가 아니라 클리셰의 무자각 사용이다. 부품인 줄 모르고 쓰면 작품이 부품 조립품으로 보이고, 부품인 줄 알고 쓰면 배치와 변형의 대상이 된다. 클리셰를 피하라는 격언의 정확한 번역은 클리셰를 모른 채 쓰지 말라는 것이다. 표준에서 급소만 비트는 기술은 클리셰 단위에서도 그대로 작동한다. 시사점은 클리셰의 재고 관리다. 자기 장르의 클리셰 목록을 문서로 보유하고, 각 항목에 사용, 변형, 회피의 판정을 달아두는 것이 설계자의 재고 조사다. 판정이 있는 재고는 자산이고, 판정이 없는 재고는 그냥 창고의 먼지다.

5. 트롭trope: 유형화된 장치

클리셰에 중립적 이름을 붙이면 트롭이 된다. 트롭trope은 반복 사용으로 유형화된 서사 장치를 가리키는 용어로, 클리셰가 품은 경멸의 뉘앙스를 벗겨낸 말이다. 영어권의 트롭 위키가 이 관점의 기념비다. 수십만 개의 장치가 이름을 얻고, 정의와 사례와 변형 계보가 달린 채 목록화되어 있다. 창작의 재료 전체가 부품 데이터베이스로 정리될 수 있음을 실증한 사례이며, 설계자가 지향할 문서 체계의 민간 선례이기도 하다. 트롭이라는 개념의 실무 가치는 해상도에 있다. 클리셰가 덩어리라면 트롭은 그 덩어리의 부품 단위 분해를 가능하게 한다. 시골 출신의 용사라는 클리셰는 비천한 출신, 숨겨진 혈통, 스승과의 사별, 고향의 파괴라는 트롭들의 관습적 묶음으로 분해된다. 분해가 되면 재조합이 된다. 묶음에서 혈통 트롭만 빼고 나머지를 유지하면, 익숙하되 어딘가 다른 용사가 나온다. 독자가 느끼는 신선함의 상당수는 발명이 아니라 이런 부분 교체다. 유형론 총정리에서 확인한 조합의 원리가 장치 단위에서 반복되는 것이다. 시사점은 추출의 해상도 훈련이다. 작품을 분해할 때 클리셰 수준에서 멈추지 말고 트롭 수준까지 쪼개는 습관을 들이면, 같은 원천에서 몇 배의 재사용 부품이 나온다. 트롭 위키의 항목 이름들을 훑는 것만으로도 분해의 어휘가 는다. 어휘가 늘면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부품의 수가 는다.

6. 메타포: 키워드에 실리는 의미

부품에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다. 키워드는 의미를 싣는 그릇이기도 하며, 그 적재의 원리가 메타포metaphor다. 메타포는 하나의 것으로 다른 것을 가리키는 의미 작용이다. 사과라는 키워드는 과일이면서 동시에 지식의 금단, 낙원의 상실, 만유인력의 발견, 특정 기업의 상징을 실어 나른다. 세계관 재료로서 키워드의 값은 이 적재량에 비례한다. 아무 의미도 싣지 않은 키워드는 기능 부품에 그치지만, 메타포가 실린 키워드는 등장만으로 주제를 운반한다. 뱀파이어의 규칙 목록이 은유의 단자였다는 관찰이 바로 이 원리였다. 흡혈이라는 키워드에는 포식과 욕망과 착취가 이미 실려 있어서, 작가는 단자에 전류만 흘리면 된다. 적재된 의미를 모르고 쓰면 반대로 의도치 않은 전류가 흐른다. 상징은 무지에 면책을 주지 않는다. 적재는 설계로 수행할 수도 있다. 세계의 핵심 키워드를 고르고, 거기에 실을 의미를 결정하고, 그 의미가 드러날 장면의 계열을 예비하는 것이다. 반지 하나에 권력의 유혹을 실어 세계 전체의 주제를 운반하게 한 선례가 그 정점에 있다. 시사점은 상징 대장의 관리다. 세계의 키워드 중 의미가 적재된 것들을 별도 목록으로 관리하고, 각 키워드에 실린 의미와 금기시할 오용을 명시한다. 상징의 남발과 혼선은 이 대장이 없는 세계에서 일어난다. 모든 것이 상징인 세계는 아무것도 상징이 아닌 세계와 같아진다.

7. 전승문학: 키워드와 클리셰의 원형 저장소

부품과 의미의 최대 광맥은 전승문학이다. 신화, 전설, 민담, 전래동요까지, 구전으로 살아남은 이야기 자산 전체를 가리킨다. 유형론에서 재료로 다뤘던 이 층위를 방법론의 눈으로 다시 보면, 전승문학은 인류가 운영해온 가장 오래된 키워드 데이터베이스다. 수백 년의 구전은 수백 년의 편집 공정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디테일은 탈락하고 강한 뼈대만 남는 이 선별 과정이, 트롭과 메타포의 정제 공정 역할을 했다. 용, 마녀, 버려진 아이, 세 가지 소원, 깨지는 금기. 전승의 키워드들은 전부 이 공정을 통과한 고순도 부품이며, 저작권마저 없다. 신작의 재료난에 시달리는 설계자가 가장 먼저 열어볼 서랍이다. 추출 실무의 관점에서 전승문학의 또 다른 가치는 조합의 견본이다. 민담의 유형 분류 연구들은 세계 각지의 이야기가 유한한 모티프의 조합임을 보여주었고, 이는 유한한 부품으로 무한한 세계가 조립된다는 설계 명제의 오래된 증명이다. 시사점은 이중의 추출이다. 전승문학에서 키워드를 캘 때는 부품 자체와 함께 부품의 결합 방식도 캐야 한다. 도깨비라는 키워드만 가져오는 것과, 도깨비가 인간과 내기를 맺는 관계 구조까지 가져오는 것은 추출의 깊이가 다르다. 후자가 앞서 말한 조건 단위의 이식이며, 재사용의 값어치도 몇 배가 된다. 관계 구조까지 캐는 습관은 민담 연구의 형태소 분석에서 배워올 수 있다.

8. 키워드 추출: 작업의 방법

재료를 알았으니 동작을 정리한다. 키워드 추출은 원천을 훑어 키워드 후보를 목록화하는 작업이며, 절차는 네 단계로 표준화할 수 있다. 첫째, 원천의 확정이다. 무엇을 훑을지 정한다. 원작의 본문, 수집한 자료, 회의록, 경쟁 작품, 전승문학까지, 원천의 목록 자체가 관리 대상이다. 둘째, 통독과 표시다. 원천을 처음부터 읽으며 키워드가 될 만한 조각에 표시를 남긴다. 이 단계의 규율은 판정의 유보다. 쓸모를 따지며 읽으면 그물눈이 좁아져 의외의 재료를 놓친다. 일단 넓게 건지고 판정은 다음으로 미룬다. 셋째, 목록화와 초벌 분류다. 표시된 조각들을 한 곳에 모아 표제를 달고, 여덟 계열의 지도에 따라 초벌로 분류한다. 이때 출처 표기가 함께 붙는다. 어디서 건졌는지 없는 조각은 나중에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 출처 없는 키워드는 검수 단계에서 전부 재조사되므로, 표기의 몇 초가 재조사의 몇 시간을 산다. 넷째, 후보 판정이다. 목록을 훑으며 등재 후보, 보류, 폐기를 가른다. 판정 기준은 수요다. 스펙 리스트와 우선 굴착 지점에 닿는 것이 후보가 된다. 시사점은 추출의 반복성이다. 추출은 착수기의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원천이 갱신될 때마다 도는 상시 공정이며, 특히 연재 중의 세계에서는 매 회차가 새 원천이다. 회차 발행과 동시에 그 회차를 추출하는 루틴이 지혈의 실무 형태다. 밀린 추출은 밀린 설거지처럼 볼수록 손대기 싫어진다.

9. 추출이 중요한 이유: 설계의 관문

절차를 알면 이 동작의 지위를 물을 차례다. 추출은 왜 사이클의 첫 자리에 있는가. 답은 추출이 존재와 자산 사이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추출되지 않은 설정은 존재하지만 자산이 아니다. 원작 어딘가에 쓰여 있는 설정, 창작자의 머릿속에 있는 구상, 회의에서 합의된 방향은 모두 존재한다. 그러나 검색되지 않고, 인용되지 않고, 다른 항목과 대조되지 않는다. 문장 속에 묻힌 설정은 그 문장을 기억하는 사람의 수명만큼만 산다. 조직의 세계가 개인의 기억에 저당 잡히는 것이다. 추출이라는 동작이 하는 일은 이 묻힌 존재들을 관리 가능한 상태로 이송하는 것이다. 목록에 오른 순간부터 설정은 대조되고, 충돌이 발견되고, 재사용이 검토된다. 앞서 본 병리들을 이 관점에서 재진단할 수 있다. 패러독스의 산지였던 즉석 결정은 추출 없이 본문으로 직행한 설정이고, 파생버전의 발산은 추출되지 않아 대조 불가능했던 차이들이다. 담당자와 함께 사라지는 세계는 추출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세계다. 요컨대 세계관 관리의 실패 대부분은 등재 이전, 추출의 부재에서 이미 시작된다. 시사점은 추출률이라는 감각이다. 존재하는 설정 중 목록에 오른 비율을 어림으로라도 의식하는 것이다. 추출률이 낮은 세계에서 정의와 등재의 정교함은 사상누각이다. 관문이 아무리 엄정해도 관문 앞까지 오는 설정이 없으면 세계는 자라지 않는다.

10. 키워드의 한계: 추출이 담지 못하는 것

키워드론의 마지막은 이 단위의 한계다. 키워드는 설계의 최소 단위이지 세계의 전부가 아니다. 목록이 담지 못하는 것이 셋 있다. 첫째, 배열이다. 같은 키워드 집합도 배치가 다르면 다른 세계가 된다. 용과 기사와 공주라는 부품은 구출담도, 용의 시점의 비극도, 삼자의 정치극도 조립할 수 있다. 부품 목록은 조립도를 포함하지 않는다. 같은 재료로 다른 세계를 짓는 자유가 여기서 나오고, 같은 재료라서 비슷해지는 함정도 여기서 나온다. 둘째, 관계다. 키워드와 키워드 사이의 연결, 곧 혈원이 단검과 맺는 관계, 강호가 조정과 맺는 관계는 개별 항목의 설명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관계 자체가 별도의 기록 대상이며, 이것이 다음 편의 상호연결 문제다. 셋째, 질감이다. 목록은 세계를 관리 가능하게 하지만, 독자가 사랑하는 것은 목록이 아니라 그 목록이 조립되어 낸 세계의 공기다. 객체화가 무형을 항목으로 만들어주지만, 항목들의 합이 자동으로 공기를 복원하지는 않는다. 이 한계들은 결함이 아니라 분업의 선이다. 키워드는 재료를 맡고, 배열과 관계는 정의와 서사가 맡고, 질감은 창작이 맡는다. 재료 단위가 전부라고 믿는 순간 설계는 목록 물신주의에 빠지고, 재료 단위를 건너뛰는 순간 관리는 무너진다. 한계를 아는 도구가 좋은 도구다. 그러므로 다음 문제는 자명하다. 목록에 오른 후보들에 뜻과 이름을 확정하는 두 번째 동작,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