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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DONG-EUN · 세계관설계자 (15편)

정의와 네이밍

김동은WhtDrgon. · 12편

12편. 정의와 네이밍

목록에 오른 후보들은 아직 세계의 구성원이 아니다. 뜻이 확정되지 않았고 이름이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업 사이클의 두 번째 동작, 정의를 다룬다. 12편의 관통 질문은 이것이다: 이름을 붙이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전반부는 뜻을 확정하는 정의의 기술을, 후반부는 이름을 결정하는 네이밍의 기술을 맡는다. 두 기술이 합쳐져야 키워드 후보는 세계의 단어가 된다.

1. 정의: 세계 안에서 다시 쓰는 사전

정의는 어떤 키워드가 이 세계에서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를 확정하는 작업이다. 설계자의 정의가 사전 편찬과 다른 점은 준거의 위치다. 사전은 현실의 용례를 준거로 삼지만, 설계자는 세계 내부를 준거로 삼아 사전을 다시 쓴다. 기사라는 단어를 예로 들면, 현실 사전의 기사는 중세 유럽의 무장 신분이다. 설계자의 질문은 다르다. 이 세계에서 기사란 무엇인가. 세습되는가 서임되는가, 말을 타는가 용을 타는가, 몇 명이나 있는가, 무엇에 충성하는가. 답이 확정될 때마다 이 세계의 기사는 현실의 기사와 갈라지며, 그 갈라짐의 총합이 세계의 고유성이 된다. 정의 작업이란 결국 현실이라는 기본값에서 이 세계가 이탈하는 지점들을 확정하는 일이다. 정의문의 규격도 필요하다. 좋은 정의는 소속과 차이의 구조를 가진다. 무엇의 일종이며, 같은 부류의 다른 것들과 무엇이 다른지를 밝히는 것이다. 왕국 직속의 중장 기병이되 서임에 마법 서약이 포함된다는 식이면, 소속으로 이해가 빠르고 차이로 고유성이 선다. 부정의 명시도 규격에 넣을 가치가 있다. 이 세계의 기사가 아닌 것, 곧 용병과 자경단과의 경계를 적어두면 오용이 예방된다. 시사점은 정의의 검증 질문이다. 이 정의문만 읽은 외부 작가가 이 키워드를 틀리지 않게 쓸 수 있는가. 통과하지 못하는 정의는 아직 감상이지 정의가 아니다. 정의문은 세계가 외부와 만나는 최전선의 문장들이다.

2. 재정의: 현실의 단어를 비트는 기술

정의의 기술 중 가장 효율이 높은 것이 재정의다. 재정의는 현실에 이미 있는 단어를 가져와 뜻을 비트는 조작이다. 새 단어의 발명과 비교하면 경제성이 명확하다. 발명된 단어는 발음과 뜻을 둘 다 가르쳐야 하지만, 재정의된 단어는 발음이 공짜다. 독자는 아는 단어를 만나 안심하고, 비틀린 뜻을 만나 긴장한다. 헌터와 각성자 같은 장르 표준어들이 전부 이 경로로 태어났다. 익숙함이 진입 비용을 내리고 낯섦이 호기심을 올리는, 클리셰 활용과 같은 구조의 경제다. 비틀기의 방향은 셋으로 정리된다. 확장이다. 사냥꾼이라는 단어가 짐승이 아니라 괴물을 잡는 직업을 가리키게 되는 식으로, 뜻의 범위를 넓힌다. 축소다. 계약이라는 일반어가 이 세계에서는 오직 악마와의 계약만을 가리키게 되는 식으로, 범위를 좁혀 무게를 싣는다. 전도다. 낙원이라는 단어가 추방지의 공식 명칭이 되는 식으로, 뜻을 뒤집어 세계의 아이러니를 단어 하나에 심는다. 세 방향 모두 원래 뜻이 독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전제로 작동한다. 비틀기는 기준점이 있어야 성립하는 기술이다. 전도형 재정의는 유토피아의 이중 장부를 어휘 차원에서 구현하는 셈이다. 시사점은 재정의 목록의 관리다. 이 세계가 현실과 다르게 쓰는 단어들의 대조표, 곧 현실 뜻과 세계 내 뜻의 이열 표는 외부 창작자 온보딩 문서의 핵심 장이 된다. 재정의가 많은 세계일수록 이 표 없이는 오역이 양산된다. 번역가에게도 이 표가 최우선 인계 문서가 된다.

3. 내포한 철학: 정의에 담기는 세계의 입장

정의문은 중립적인 기술문서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계의 입장이 실리는 그릇이다. 무엇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그 세계가 무엇을 옳고 값지다고 여기는지, 곧 철학 축의 값이 배어들기 때문이다. 마법을 정의하는 두 세계를 비교하면 선명하다. 한 세계는 마법을 정령과 맺는 우정의 기술로 정의하고, 다른 세계는 등가교환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거래로 정의한다. 같은 현상의 두 정의는 전혀 다른 세계를 함축한다. 앞의 세계에서 마법의 실패는 관계의 파탄이고, 뒤의 세계에서 실패는 지불 능력의 부족이다. 정의 하나가 갈등의 문법까지 예약하는 것이다. 설정 회의에서 정의문의 조사 하나를 두고 다투는 일이 사치가 아닌 이유다. 죽음, 명예, 가족, 힘 같은 근본 키워드일수록 이 함축의 하중이 크다. 죽음을 귀향으로 정의한 세계와 소멸로 정의한 세계는 장례 풍속부터 전쟁관까지 갈라진다. 이 원리는 역방향의 점검 도구가 된다. 세계의 철학이 흐릿할 때, 근본 키워드들의 정의문을 나란히 놓고 읽으면 이 세계가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선언된 철학과 정의에 배어든 철학이 어긋나 있다면 세계는 이미 균열을 품은 것이다. 자비를 표방하는 세계의 형벌 정의가 잔혹하다면,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이다. 시사점은 정의 감수의 이중 기준이다. 정의문은 정확한가와 함께 이 세계다운가로 심사되어야 한다. 후자의 심사 기준이 바로 네 축의 선언문이다.

4. 상호연결: 정의가 정의를 부르는 구조

정의들은 고립되어 있지 않다. 하나의 정의문은 다른 키워드들을 참조하며 성립한다. 기사의 정의에 왕국과 서임과 마법 서약이 등장했다면, 그 세 키워드도 정의를 요구받는다. 정의가 정의를 부르는 이 연쇄가 상호연결이며, 복합적 확장이 어휘 차원에서 나타난 형태다. 연결에는 두 얼굴이 있다. 좋은 얼굴은 그물의 견고함이다. 서로를 참조하는 정의들은 서로를 검증한다. 서약의 정의가 바뀌면 기사의 정의가 흔들리므로, 개정 시 충돌이 자동으로 드러난다. 촘촘한 참조망은 패러독스의 조기 경보망이기도 한 것이다. 정의의 그물이 곧 검수의 그물이다. 나쁜 얼굴은 순환과 미정의의 누적이다. 서로가 서로로만 설명되는 순환 정의는 그물처럼 보이지만 어디에도 닿아 있지 않고, 참조된 채 정의되지 않은 미정의 항목이 쌓이면 그물에 구멍이 늘어난다. 관리의 도구는 참조 관계의 가시화다. 각 정의문이 참조하는 키워드를 명시적으로 표기하면, 문서 체계 전체가 연결 그래프로 조망된다. 어느 항목이 많이 참조되는지, 어느 항목이 미정의로 남았는지가 자료로 보인다. 참조 수가 많은 항목이 곧 세계의 허브 키워드이며, 우선 굴착 지점 판단의 새 근거가 된다. 시사점은 미정의 대기열의 운영이다. 정의 작업 중 참조된 미정의 키워드를 자동으로 대기열에 넣는 루틴을 만들면, 정의 작업 자체가 다음 작업의 목록을 생산한다.

5. 정의와 서사: 설정이 이야기가 되는 접점

정의의 그물이 짜이면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다. 정의들이 만나 이야기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기사는 마법 서약으로 왕국에 묶인다는 정의와, 서약은 파기될 때 대가를 요구한다는 정의가 세계에 공존한다고 하자. 두 문장은 각각 기술문이지만, 나란히 놓이는 순간 질문이 태어난다. 서약을 파기한 기사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질문은 인물을 부르고, 인물은 사건을 부른다. 설정이 이야기가 되는 접점은 바로 이 지점, 정의와 정의가 만나 긴장을 만드는 자리다. 이 발생은 우연이 아니라 설계할 수 있다. 원리는 정의에 방향성을 심는 것이다. 상태만 진술하는 정의는 정적이지만, 조건과 귀결을 품은 정의는 동적이다. 서약은 신성하다보다 서약은 파기 시 대가를 요구한다가 이야기를 더 많이 발생시킨다. 금기, 대가, 예외, 시한 같은 성분이 정의에 들어 있으면, 그 키워드는 놓이는 자리마다 갈등을 방출한다. 유형론에서 본 규범표가 딜레마를 생산하던 원리의 일반화다. 시사점은 발생 가능성의 심사다. 핵심 키워드의 정의를 확정할 때, 이 정의가 다른 정의들과 만나 몇 개의 질문을 낳는지 세어보라. 질문을 낳지 못하는 정의만 쌓인 세계는 정합적이되 불임이다. 감수의 저울에는 정확성과 함께 생산성이 올라가야 한다. 세계의 다산성은 뒤에서 자가동력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다룬다.

6. 네이밍: 이름이 하는 일

후반부는 이름의 문제다. 네이밍naming은 정의된 항목에 부를 이름을 결정하는 작업이며, 정의와 짝을 이루는 또 하나의 확정이다. 이름이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첫째, 이름은 주소다. 검색과 인용과 참조가 전부 이름을 경유하므로, 이름은 문서 체계의 기본 인프라다. 표제의 규칙성이 규격의 조건이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둘째, 이름은 첫 정보다. 독자는 정의문을 읽기 전에 이름부터 만나며, 이름의 어감과 구조에서 대상의 첫인상을 수신한다. 흑요 기사단과 해바라기 기사단은 정의를 읽기 전에 이미 다른 조직이다. 첫인상과 정의가 어긋난 이름은 독자를 두 번 가르쳐야 하는 비싼 이름이 된다. 셋째, 이름은 세계의 표본이다. 고유명사들의 어감이 모여 세계의 언어적 질감을 이루고, 독자는 그 질감으로 세계의 결을 감지한다. 명명이 일관된 세계는 이름만 들어도 어느 세계 것인지 식별되며, 이 식별력이 곧 브랜드다. 넷째, 이름은 권리의 단위다. 상표와 도메인과 검색 점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설정이 아니라 이름이라서, 상업 세계관에서 네이밍은 법무의 문제이기도 하다. 시사점은 네이밍의 지위 격상이다. 이름 짓기를 정의 확정의 부속 절차나 막판의 장식으로 다루는 관행이 흔한데, 이름은 항목의 얼굴이자 주소이므로 정의와 동급의 확정 절차로 다뤄야 한다. 이어지는 네 주제가 그 절차의 내용이다.

7. 이름이란 무엇인가

절차에 앞서 이름의 구조를 확인한다. 이름은 두 성분의 합성물이다. 지시와 함축이다. 지시는 이름이 가리키는 기능이다. 어떤 소리와 표기가 특정 대상을 다른 것과 혼동 없이 가리키면 지시는 성립하며, 이때 이름의 뜻은 없어도 된다. 함축은 이름이 풍기는 성분이다. 어원, 어감, 연상, 길이, 발음의 인상까지, 이름이 지시 이전에 실어 나르는 정보들이다. 두 성분의 배합비가 이름의 성격을 정한다. 함축이 얕은 이름은 기호에 가깝다. 구역 7, K-3 실험체 같은 이름은 지시만 남긴 명명이며, 그 건조함 자체가 관료제나 비인간성의 함축이 되기도 한다. 함축이 깊은 이름은 이야기를 품는다. 어스름 관문이라는 지명은 위치를 가리키면서 동시에 시간과 경계의 심상을 싣는다. 세계관 명명의 고전적 정점은 함축을 언어 체계까지 밀고 간 경우다. 가상의 언어를 먼저 설계하고 그 언어의 조어법으로 이름들을 파생시키면, 세계의 모든 이름이 하나의 어족으로 울린다. 톨킨의 지명과 인명이 주는 일관된 울림이 그 증명이다. 시사점은 배합의 의도성이다. 이 이름에서 함축을 얼마나 실을지는 대상의 지위에 따라 결정할 문제이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핵심 키워드에는 깊은 함축을, 관리용 항목에는 건조한 지시를 배정하는 차등이 명명 체계의 경제학이다.

8. 무엇을 이름 붙일 것인가

이름의 구조를 알면 다음 질문은 범위다. 세계의 모든 것에 이름을 붙일 수는 없고, 붙여서도 안 된다. 명명에는 이중의 비용이 따르기 때문이다. 하나는 관리 비용이다. 이름이 붙는 순간 그 항목은 표기 통일과 개정 추적의 대상이 되어 문서 체계의 부양가족이 된다. 다른 하나는 독자의 인지 비용이다. 고유명사는 독자가 외워야 하는 어휘이며, 작품 초반에 쏟아지는 낯선 이름들은 진입 장벽의 주범이다. 판타지 소설의 첫 장에서 독자가 이탈하는 지점은 대개 다섯 번째 고유명사 근처다. 그러므로 명명은 선별이어야 한다. 기준은 재등장과 참조다. 이야기와 문서에서 반복해 불릴 것, 다른 항목의 정의에 참조될 것에만 이름을 발급한다. 한 번 스치는 주점은 그냥 주점이면 되고, 주인공이 매주 모이는 주점만이 이름을 얻는다. 이름의 발급이 그 자체로 지위의 부여라는 점도 활용 대상이다. 복선의 배치에도 쓰인다. 미리 이름을 얻어둔 사물은 재등장의 예고장을 품은 셈이다. 독자는 이름 붙은 것을 중요한 것으로 학습하므로, 명명의 분포가 곧 세계의 스포트라이트 배치가 된다. 시사점은 명명 대장의 운영이다. 발급된 이름의 총량과 분포를 관리하고, 신규 명명은 재등장 예정이라는 수요 증빙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름의 인플레이션은 세계의 화폐 가치, 곧 이름 하나하나의 무게를 떨어뜨린다. 이름이 귀한 세계에서는 명명 자체가 사건이 된다.

9. 명명 규칙: 언어 설계의 최소한

선별된 대상들에 이름을 지을 때, 개별 작명보다 먼저 할 일이 규칙의 수립이다. 명명 규칙은 이 세계의 이름들이 공유할 조어의 원칙으로, 완전한 언어 설계까지 가지 않고도 세계의 언어적 일관성을 확보하는 최소한의 장치다. 규칙의 표준 항목은 다음과 같다. 음운의 팔레트다. 이 문화권의 이름에 자주 쓰일 소리와 금지할 소리를 정한다. 거센소리가 많은 북방과 유음이 많은 남방처럼, 팔레트의 차이만으로 문화권의 구분이 귀에 들리게 된다. 접사의 체계다. 지명의 끝에 붙는 성분, 인명의 존칭과 가문 표기 같은 반복 부품을 정해두면, 신규 이름이 자동으로 세계의 결을 입는다. 표기와 번역의 원칙이다. 로마자 표기, 한글 음차의 기준, 뜻 번역과 소리 음차의 선택 기준을 정한다. 다국어 전개를 예정한 세계라면 이 항목이 명명 규칙의 절반이다. 금칙의 목록이다. 실존 상표와의 충돌, 비속어와의 우연한 일치, 문화권별 금기어를 걸러낼 점검 목록을 둔다. 시사점은 규칙 문서의 선행이다. 명명 규칙 한 장을 먼저 만들고 개별 이름을 그 위에서 짓는 순서가, 이름들을 먼저 짓고 사후에 일관성을 꿰매는 순서보다 언제나 싸다. 규칙은 명명의 속도도 올린다. 백지에서 짓는 것보다 팔레트 안에서 고르는 쪽이 빠르기 때문이다. 협업에서는 규칙이 품질의 하한선 역할까지 한다. 규칙을 지킨 이름은 최소한 세계의 결을 해치지 않는다.

10. 이름은 어떻게 관리되는가

명명의 마지막 문제는 수명이다. 이름은 한번 지어지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관리되는 자산이다. 관리의 첫 축은 표기의 단속이다. 같은 대상이 문서마다 다르게 표기되는 순간 검색이 죽고, 검색이 죽으면 그 항목은 사실상 두 개의 항목으로 분열된다. 정본 표기를 하나 정하고 허용 표기와 금지 표기를 명시하는 표기 대장이 단속의 도구다. 둘째 축은 개명의 절차다. 이름은 바뀔 수 있다. 상표 충돌이 발견되고, 번역 시장에서 문제가 드러나고, 세계의 개편이 이름의 교체를 요구한다. 문제는 이름이 문서 체계의 주소라는 데 있다. 주소의 변경은 그 이름을 참조하던 모든 문서의 갱신을 뜻하므로, 개명은 구명과 신명의 대응 기록과 참조 문서의 일괄 수정을 포함한 절차로 집행되어야 한다. 절차 없는 개명은 세계에 유령 주소를 남긴다. 옛 이름으로 검색하는 사람은 세계에서 길을 잃는다. 셋째 축은 이력의 보존이다. 폐기된 이름도 기록에서 지우지 않는다. 과거 산출물에는 옛 이름이 남아 있고, 팬덤의 기억에도 남아 있으므로, 구명의 이력은 검색의 별칭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이 세 축이 시사하는 바는 분명하다. 이름의 관리는 곧 문서 체계의 관리이며, 정의와 명명이라는 확정의 기술은 확정된 것을 보관하고 운반하는 체계를 요구한다. 단어를 확정하는 기술과 확정된 단어를 살아 있게 하는 기술은 별개의 기술이다. 그 체계가 사이클의 마지막 동작, 등재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