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DONG-EUN · 세계관설계자 (15편)
왜 세계관인가
3편. 왜 세계관인가
핍진성이 세계관의 품질 기준이라면, 이제 남는 것은 값의 문제다. 낭비와 사치를 필수요소로 가진 작업에 조직이 왜 돈을 대는가. 세계관은 무엇을 벌어다 주는가. 3편은 이 질문에 산업의 언어로 답한다. 답의 뼈대는 확장이다: 하나의 세계가 여러 매체로, 여러 작품으로, 여러 사업으로 늘어나는 구조 속에서 세계관은 비용이 아니라 기반 설비가 된다. 그 구조를 이루는 개념들을 순서대로 확정한다.
1. OSMU: 원 소스 멀티 유즈
확장을 가리키는 가장 익숙한 말이 OSMU다.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 하나의 원천 콘텐츠를 여러 매체와 상품으로 활용하는 전략을 뜻하며, 한국 콘텐츠 산업이 특히 즐겨 써온 용어다. 성공한 웹툰이 드라마가 되고, 드라마가 게임이 되고, 캐릭터가 인형과 문구가 되는 경로가 전형이다. OSMU의 경제 논리는 명료하다. 검증된 원천은 실패 확률을 낮추고, 이미 형성된 팬은 초기 마케팅 비용을 대신한다. 새 매체로 옮길 때마다 제로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 이점이다. 실패해도 원천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 분산의 효과도 있다. 한 번의 각색 실패가 원작의 팬덤까지 지우지는 못한다. 그런데 이 전략의 성패는 옮겨지는 것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다. 줄거리만 옮기면 각색이고, 캐릭터만 옮기면 라이선스 상품이다. 매체가 바뀌어도 훼손되지 않고 옮겨지는 자산이 따로 있으니, 그것이 세계다. 줄거리는 매체의 문법에 따라 바뀔 수밖에 없지만, 그 사건들이 벌어지는 세계의 법칙과 지리와 역사는 공통 기반으로 남는다. OSMU가 반복될수록 원 소스의 실체는 특정 작품에서 그 작품의 세계관 쪽으로 이동한다. 활용이 거듭되면 원천의 정의가 바뀌는 것이다. 팬들이 어느 시점부터 작품명 대신 세계의 이름으로 프랜차이즈를 부르기 시작하는 현상이 그 신호다. 이 관찰을 뒤집으면 다음 개념이 나온다.
2. MUOS: 방향을 뒤집은 발상
OSMU를 뒤집은 것이 MUOS다. 멀티 유즈를 먼저 상정하고 원 소스를 설계한다는 발상이다. OSMU가 성공한 작품에서 출발해 사후적으로 확장하는 경로라면, MUOS는 확장 계획에서 출발해 원천을 역산하는 경로다. 처음부터 드라마, 게임, 공연, 상품으로 전개될 것을 전제하고, 그 모든 활용을 견딜 수 있는 원천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그 물음의 답은 단일 작품일 수 없다. 완결된 작품은 이미 한 매체의 문법에 최적화되어 있어서, 다른 매체로 옮길 때마다 개조 비용이 든다. 모든 활용을 견디는 원천은 매체 이전의 것, 곧 세계관이다. MUOS 체제에서 세계관은 부속 문서가 아니라 첫 산출물이 된다. 작품들이 세계관에서 파생되는 순서다. 문서가 먼저 있고 콘텐츠가 그 문서를 참조하며 태어난다. 아이돌 그룹의 세계관 기획이 대표 사례다. 데뷔 전에 세계와 설정이 먼저 설계되고, 뮤직비디오와 앨범과 콘텐츠가 그 세계의 조각들로 발표된다. 원 소스에 해당하는 단일 작품은 어디에도 없는데 유니버스는 존재한다. 관객은 조각들을 통해서만 세계를 만나고, 세계의 전모는 문서 안에만 있다. 다만 MUOS는 위험도 반대로 안는다. OSMU는 검증 후 확장이라 안전하지만, MUOS는 검증 전 투자라서 세계관의 설계 품질이 사업 위험을 직접 결정한다. 설계가 직무가 되어야 하는 산업적 이유가 여기 있다.
3. 트랜스미디어: 매체를 건너는 서사
OSMU와 MUOS가 사업의 언어라면, 같은 현상을 서사의 언어로 부르는 이름이 트랜스미디어transmedia다. 미디어 학자 헨리 젠킨스가 정리한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은 하나의 이야기 세계가 여러 매체에 나뉘어 전개되고, 각 매체가 저마다 고유한 기여를 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단순 이식과의 차이가 중요하다. 같은 줄거리를 매체만 바꿔 반복하면 어댑테이션, 곧 각색이다. 트랜스미디어는 영화가 본편을, 게임이 전사를, 웹툰이 조연의 뒷이야기를 맡는 식으로 매체마다 다른 조각을 배분한다. 관객은 조각들을 모아 자기 머릿속에서 전체 세계를 조립한다. 조립의 수고 자체가 참여의 재미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 이 방식의 승부처다. 이 구조가 성립하려면 조각들이 맞물릴 공통의 판이 필요하다. 연표가 어긋나면 조립이 안 되고, 지명이 다르면 같은 세계라는 감각이 깨진다. 그 판이 세계관이고, 판의 정밀도가 곧 조립의 품질이다. 매체가 늘수록 참조 관계는 기하급수로 늘어나므로, 판의 관리 비용도 확장 규모에 비례해 커진다. 트랜스미디어에서 세계관 문서는 창작 참고자료를 넘어 매체 간 인터페이스 규격이 된다. 각 제작진은 서로의 작품을 다 볼 수 없어도 같은 문서를 참조함으로써 호환을 유지한다. 규격 문서 없이 진행된 트랜스미디어가 어떻게 어긋나는지는 이미 여러 프랜차이즈가 비싼 수업료로 증명했다.
4. IP 확장: 저작물에서 지식재산으로
매체를 건너다니는 이 자산을 산업은 IP라고 부른다. 지식재산intellectual property의 약자로, 법적으로는 저작권과 상표권 등 무형 자산에 대한 권리를 뜻하지만, 콘텐츠 업계의 관용어로는 확장 가능한 콘텐츠 자산 그 자체를 가리킨다. 작품과 IP는 지위가 다르다. 작품은 완결된 저작물이고, IP는 그 저작물에서 반복 활용 가능한 요소들의 묶음이다. 캐릭터, 세계, 명칭, 상징이 여기에 속한다. 어떤 작품이 IP가 되었다는 말은 작품의 소비가 끝난 뒤에도 수익을 낳는 자산이 추출되었다는 뜻이다. 이 추출물의 목록을 보면 세계관의 자리가 보인다. 캐릭터는 수명이 있다. 배우가 늙고, 성우가 바뀌고, 세대의 취향이 이동한다. 개별 스토리는 소비되면 끝난다. 가장 오래 남는 것은 그것들을 담고 있던 세계다. 세계는 새 캐릭터를 계속 배출할 수 있고, 새 이야기를 계속 수용할 수 있다. 장수 IP들의 공통점은 캐릭터의 힘으로 시작해 세계의 힘으로 유지된다는 것이다. 간판 캐릭터가 세대교체를 거치는 동안에도 무대가 유지되면 팬덤은 이어진다. IP 확장이라는 말의 실무적 번역은 그래서 세계관에 신규 진입로를 내는 일이 된다. 어디에 길을 낼 수 있는지 아는 사람, 곧 세계의 지도를 가진 사람이 확장의 주도권을 쥔다. 지도 없이 확장하는 조직은 매번 외부 창작자의 기억력에 의존하게 된다.
5. 투자유치: 세계관이 투자 요소가 되는 이유
지도를 가졌다는 사실은 투자 심사에서 힘을 발휘한다. 세계관의 중요성이 투자의 중요 요소가 될 만큼 커진 데에는 심사의 논리가 있다. 투자자가 콘텐츠에서 사는 것은 완성된 작품 하나가 아니라 미래 수익의 흐름이다. 작품 하나의 흥행은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흥행했을 때 얼마나 확장될 수 있는가는 어느 정도 심사가 가능하다. 불확실한 단일 사건 대신 조건부의 구조를 심사하는 쪽이 금융의 문법에 맞기 때문이다. 그 심사의 증빙이 세계관 문서다. 연대기가 있고, 미등장 지역과 인물의 목록이 있고, 파생 작품의 진입로가 표시된 문서는 이 콘텐츠가 시리즈와 스핀오프와 이종 매체로 뻗을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실사 자료가 된다. 반대로 세계관 문서가 없는 프로젝트의 확장 계획은 구두 약속과 다를 바 없다. 계획서의 확장 로드맵 한 장과 그 로드맵을 받치는 설정 문서 뭉치는 심사에서 전혀 다른 무게를 갖는다. 여기서 문서의 형태가 다시 문제가 된다. 창작자의 머릿속에만 있는 세계, 채팅과 메모에 흩어진 설정은 실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심사자는 창작자의 열정이 아니라 조직의 자산을 심사하며, 자산은 문서로 존재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전달 가능한 산출물의 형태라는 요구가 여기서 돈의 문제로 돌아온다. 같은 세계라도 문서화 수준에 따라 담보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다. 세계관 정리 작업은 그래서 창작 지원이면서 동시에 자산 실사 준비다.
6. 파생버전의 발생: 스토리텔링의 다양함
확장이 실행되면 필연적으로 생기는 현상이 있다. 파생버전이다. 파생버전은 같은 세계관에서 갈라져 나온 서로 다른 판본들을 뜻한다. 원작 웹툰의 세계와 드라마판의 세계는 같은 세계이면서 다르다. 발생 원인은 크게 셋이다. 첫째는 매체의 제약이다. 매체마다 스토리텔링의 문법이 달라서, 옮기는 순간 각색이 강제된다. 소설의 내면 독백은 영상에서 사건으로 바뀌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설정이 조정된다. 둘째는 제작 주체의 분리다. 다른 회사, 다른 감독, 다른 작가는 같은 문서를 받아도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해석의 차이는 통제할 수 있어도 제거할 수는 없다. 계약서와 감수로 줄일 수 있을 뿐이며, 완전한 통제를 시도하면 파트너를 잃는다. 각색자의 재량 범위를 미리 정해주는 쪽이 현실적이다. 셋째는 시간이다. 십 년 넘게 이어지는 세계는 시대의 감수성 변화에 맞춰 리부트되고, 리부트는 공인된 파생버전이다. 갱신 없이 버틴 세계는 낡은 감수성과 함께 침몰하므로, 리부트는 장수의 조건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이 셋 모두 사고가 아니라 확장의 정상 비용이라는 점이다. 파생버전이 하나도 없는 세계는 확장이 없었던 세계다. 판본의 개수는 그 세계가 치른 확장의 횟수와 대체로 비례한다. 그러므로 목표는 파생의 방지가 아니라 파생의 관리다. 갈라짐을 전제하고 갈라지는 방식을 통제하는 쪽으로 문제를 옮겨야 한다. 그 통제의 원칙이 다음 주제다.
7. 파생버전의 관리: 갈라진 버전을 다루는 원칙
파생을 관리하는 첫 원칙은 정본의 지정이다. 정본은 버전 간 충돌이 났을 때 기준이 되는 공식 판본으로, 캐넌의 지위를 어느 버전이 갖는지 명시하는 일이다. 원작이 정본인 경우가 많지만 당연하지는 않다. 영상판이 정본의 지위를 넘겨받는 사례도 있고, 매체별로 별도 정본을 두는 다중 정본 체제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정이 문서에 명시되어 있어야 하며, 결정되지 않은 정본은 분쟁이 났을 때 정치로 결정된다. 문서로 정하지 않은 것은 결국 목소리 큰 쪽이 정하게 된다는 뜻이다. 둘째 원칙은 차이의 기록이다. 버전 간의 다른 점을 숨기거나 방치하지 않고 대조표로 관리한다. 드라마판에서 변경된 설정의 목록이 있으면 다음 파생 작품이 어느 쪽을 따를지 선택할 수 있다. 목록이 없으면 세 번째 버전은 두 버전의 차이를 모른 채 제3의 변형을 만들고, 세계는 통제 없이 발산한다. 셋째 원칙은 격리의 공식화다. 정본과 양립할 수 없는 시도는 외전, 평행세계, 이프if 스토리 같은 공인된 격리 구역을 만들어 수용한다. 격리는 배제가 아니라 실험실의 제공이다. 본편의 신용을 지키면서 파격을 시험할 공간이 있는 세계가 오래 간다. 실험작의 성과가 검증되면 정본으로 승격하는 경로까지 마련해두면 격리 구역은 신설 부서의 역할을 겸한다. 세 원칙의 공통분모는 하나다: 갈라짐을 기록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
8. 범용성: 세계관의 상품성
관리되는 세계는 팔릴 수 있는 세계가 되고, 여기서 범용성이라는 성질이 문제가 된다. 범용성은 세계관이 특정 작품, 특정 매체, 특정 창작자에게 덜 묶여 있는 정도다. 범용성이 높을수록 세계는 더 많은 손에서 더 많은 작품을 낳을 수 있다. 캠페인 세팅이 범용성의 극단에 있다. 어떤 진행자가 와도 쓸 수 있도록 설계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명 세팅들은 원작자가 떠난 뒤에도 수십 년째 신작을 받아내고 있다. 반대 극단에는 한 작가의 문체와 분리 불가능하게 결합된 세계가 있다. 범용성을 올리는 요인은 구체적으로 짚을 수 있다. 특정 주인공에게 의존하지 않는 갈등 구조, 한 시대에 고정되지 않은 연대기의 여백, 장르 문법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기본 규칙이 그것이다. 거꾸로 범용성을 깎는 요인도 있다. 단 한 명의 캐릭터가 세계의 존재 이유인 구조, 특정 매체에서만 구현 가능한 핵심 설정, 창작자 개인의 사정과 얽힌 내부 사정 같은 것들이다. 주의할 점은 범용성이 무조건적인 미덕은 아니라는 것이다. 모든 것에 쓰일 수 있는 세계는 아무 특징이 없는 세계와 구별되지 않는다. 백지의 범용성은 세계의 범용성이 아니다. 세계는 고유한 법칙을 가진 채로 여러 손을 견뎌야 한다. 범용성은 상품성의 조건이지 매력의 조건이 아니며, 이 긴장은 직업을 다룰 때 다시 짚는다.
9. 팬의 상상: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오는 조건
세계관의 효용 중 가장 값을 매기기 어려운 것이 팬의 상상이다. 잘 지어진 세계에서 관객은 보여준 이야기 바깥을 스스로 상상하기 시작한다. 조연의 과거를 추측하고, 등장하지 않은 지역을 그려보고, 만약을 이야기한다. 이 자발적 생산은 2차 창작으로, 팬 커뮤니티의 고증 놀이로, 파논으로 물질화된다. 산업의 눈으로 보면 이것은 무급의 콘텐츠 생산이자 이탈 방지 장치다. 다음 공식 작품이 나올 때까지의 공백기를 팬덤이 스스로 만든 콘텐츠로 버티는 것이다. 팬의 상상이 발화하는 조건은 관찰 가능하다. 첫째, 공백이 보여야 한다. 언급은 되었지만 설명되지 않은 것이 상상의 착화점이다. 모든 것이 설명된 세계는 역설적으로 상상할 거리가 없다. 완결된 백과사전은 읽을 수는 있어도 놀 수는 없다. 둘째, 공백의 가장자리가 단단해야 한다. 주변 설정이 정합적이어야 그 공백에 대한 추론이 놀이가 된다. 규칙 없는 세계의 공백은 상상이 아니라 무관심을 낳는다. 추론이 성립하려면 단서가 있어야 하고, 단서는 정합적인 주변 설정에서만 나온다. 셋째, 상상이 존중된다는 신호가 필요하다. 파논을 짓밟는 공식 행보가 반복되면 팬덤은 상상을 멈춘다. 요컨대 팬의 상상은 방목이 아니라 조성의 결과다. 설명된 것과 비워진 것의 배치가 곧 그 조성 설계다. 이 배치는 캐넌과 파논의 관계 관리와 같은 문제의 다른 이름이다.
10. 산출물 우선주의: 전달 가능한 산출물이 최우선인 이유
효용의 목록을 관통하는 조건이 하나 있다. 투자 심사를 통과하는 것도, 파생버전을 관리하는 것도, 매체 간 호환을 지키는 것도 모두 문서를 전제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연재의 실무 제1원칙은 산출물 우선주의다. 세계관 작업의 모든 국면에서 전달 가능한 산출물의 형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이다. 전달 가능하다는 조건은 세 가지로 풀 수 있다. 받은 사람이 원하는 항목을 찾을 수 있고, 찾은 내용을 출처와 함께 인용할 수 있고, 갱신된 부분을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 검색, 인용, 추적의 세 요건이다. 셋 중 하나라도 빠지면 문서는 있어도 산출물은 없는 상태가 된다. 찾을 수 없는 정보는 없는 정보이고, 출처 없는 정보는 믿을 수 없는 정보이며, 이력 없는 정보는 낡았는지 알 수 없는 정보다. 머릿속의 세계, 대화 속의 합의, 폴더에 흩어진 조각 문서는 셋 중 무엇도 충족하지 못한다. 이 원칙이 창작의 낭만과 부딪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실제로는 반대다. 문서가 세계를 지키기 때문에 창작자가 마음 놓고 떠날 수 있고, 돌아올 수 있고, 교체될 수 있다. 산출물은 창작자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창작자를 소모품이 되지 않게 한다. 사람이 기억의 인질로 잡혀 있는 조직에서는 휴가도 이직도 세계의 위기가 된다. 무엇이 그 산출물을 만들 수 있는 직무인가, 그 직무는 작가와 무엇이 다른가. 효용의 이야기는 이렇게 직업의 이야기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