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JE PROCESS · MEJE 캐릭터특화 프로세스 (14편)
충분히 호흡하는 존재: 캐릭터를 한 인간으로, 그리고 제작자는 누구인가
제1장. 충분히 호흡하는 존재: 캐릭터를 한 인간으로, 그리고 제작자는 누구인가
독자가 한참 좋아한 캐릭터 한 명을 잠깐 떠올려 보십시오. 어떤 책의 주인공일 수도 있고, 영화나 드라마의 인물일 수도 있고, 오래 즐긴 게임의 NPC(Non-Player Character의 줄임말로,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하지 않고 시스템이 움직이는 등장인물입니다. 상점 주인, 길을 알려 주는 행인, 곁을 따르는 동료처럼 세계를 채우는 인물들이죠. 잘 만든 NPC 한 명이 주인공보다 오래 기억에 남기도 합니다)일 수도 있고, 가끔 본 만화의 단편 등장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한 명만 골라 보세요.
골랐다면 한 가지 더 떠올려 봅시다. 그 인물이 작중 어떤 한 장면에서 한 작은 행동. 잠깐 멈춰 사진 찍히듯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던 동작이라든가, 누가 슬쩍 말을 건넸을 때 답하기 전에 두 박자 침묵하던 모습이라든가, 어느 비 오는 거리에서 아주 익숙하게 우산을 펼치던 모양 같은 것. 작가가 그 인물을 만들면서 그렇게 오래 고민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작은 버릇 하나면 됩니다.
그런 작은 버릇 하나가 인물을 통째로 살려 낸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는 사람을 해치기 전 동전을 던지고는 "불러 봐(call it)"라며 상대에게 앞뒤를 고르게 합니다. 운명을 동전 한 닢에 맡기는 그 행동과 소리만으로 인물의 서늘함이 완성됩니다. (코맥 매카시 원작, 코엔 형제 영화)
-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이카리 신지는 세상이 무서울 때 낡은 카세트 플레이어로 같은 트랙을 몇 번이고 반복해 듣습니다. 도망치고 싶은 소년의 심정이 그 손가락 하나 까딱 않는 버릇에 다 담깁니다.
- 〈대부〉의 비토 코를레오네는 죽기 직전 손주와 정원에서 오렌지 껍질을 이에 끼우고 괴물 흉내를 냅니다. 평생 사람을 해쳐 온 노인이 마지막에 보여 주는 이 장난 하나가 그를 한 명의 할아버지로 되돌립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 〈기생충〉의 기택은 한마디 없이도 몸에 밴 반지하 냄새로 신분이 드러납니다. 박 사장이 무심코 코를 막는 그 순간, 두 세계 사이의 거리가 대사 없이 측정됩니다. (봉준호)
- 〈셜록〉의 셜록 홈즈는 추리가 막히면 두 손바닥을 모아 입술에 댑니다. 머릿속 도서관을 뒤지는 중이라는 신호죠.
- 이 점을 더 뾰족하게 보여 주는 예가 장피에르 죄네 〈아멜리에〉의 아멜리에입니다. 곡물 자루에 손을 깊이 파묻고, 크렘 브륄레 윗면을 숟가락으로 톡 깨뜨리고, 운하에 물수제비를 뜨는 사소한 감각의 습관들. 거창한 사연 없이 '작은 즐거움의 목록'이 그대로 한 사람이 됩니다.
저는 가끔 그런 순간을 들여다보다가 묘한 기분에 잠깁니다. 저 인물은 분명 누군가가 만든 인물입니다. 종이 위에 적혀 있거나 화면 안에 그려져 있거나 모니터 너머에 데이터로 존재하는, 명백히 허구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 작은 버릇 하나가, 그가 진짜로 어딘가에 살고 있는 것 같다는 감각을 줍니다. 그가 책장을 덮고 화면을 끈 뒤에도 어딘가에서 똑같이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똑같이 두 박자 침묵하다가 답하고, 똑같이 우산을 펼치고 있을 것 같은 감각.
연기에서도 같은 원리가 쓰입니다. 배우가 인물에게 고유한 손버릇이나 걸음걸이를 부여하는 일을 '비즈니스(business)'라고 부릅니다. 더스틴 호프먼이 〈레인 맨〉에서 보여 준 반복 행동, 히스 레저가 〈다크 나이트〉의 조커에게 입힌 혀로 입술을 핥는 버릇이 그런 예입니다. 만화에서는 이를 캐릭터의 시그니처 포즈나 말버릇으로 굳혀 둡니다. 매체는 달라도 "작은 동작에 인물을 싣는다"는 발상은 같습니다.
그 감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글입니다. 14장에 걸쳐 한 캐릭터가 0에서부터 한 인물로 자리잡기까지의 작업을 한 단계씩 풀어 가겠습니다. 첫 장인 오늘은 이 작업에 들어설 때 저희가 가지고 들어가는 자세, 그리고 그 자세를 지닌 사람이 누구이며 누구와 함께 일하는가를 정리해 두려고 합니다.
돋보기 · 짐 자무시 〈패터슨〉의 패터슨 뉴저지의 버스 기사 패터슨에게는 이렇다 할 사건이 없습니다. 매일 같은 시각에 깨어 시리얼을 먹고, 같은 노선을 운전하고, 점심시간에 몰래 시를 쓰고, 저녁엔 개를 산책시키며 늘 같은 바에서 맥주 한 잔을 합니다. 영화는 이 반복되는 작은 습관들만으로 한 사람의 내면 전체를 그려 냅니다. 사건이 인물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매일의 사소한 결이 인물을 살아 있게 한다는 이 장의 명제를, 가장 조용하고 정확하게 보여 주는 한 편입니다.
캐릭터는 데이터가 아닙니다
이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 종종 들고 오는 양식이 있습니다. 캐릭터 시트라는 이름이 붙어 있고, 이름·나이·성별·키·몸무게·외모·취미·특기·트라우마 같은 칸이 있는 표 한 장입니다. 그 표를 채우면 캐릭터가 만들어진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칸이 모두 까매지면 한 사람이 완성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캐릭터 시트의 한 줄을 훌쩍 넘어선 인물들을 떠올려 봅시다.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의 장발장은 처음엔 '빵을 훔쳐 19년을 산 전과자 24601번'이라는 차가운 데이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촛대를 훔친 그를 도리어 용서하는 주교 앞에서, 그 번호는 한 사람의 평생으로 부풀어 오릅니다. 같은 작품의 자베르는 '법이 곧 정의'라는 한 줄짜리 신념이, 그 신념이 무너지는 순간 강물로 몸을 던지는 비극까지 자라난 인물입니다. 능력치 표 어디에도 '센강'이라는 칸은 없습니다.
저희가 그 양식을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저희도 비슷한 양식을 사용합니다. 다만 저희는 그 표가 캐릭터를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표는 캐릭터가 만들어진 뒤에 그를 정리해 두는 공간입니다. 만드는 작업은 표를 채우는 일과 다른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같은 표를 두 사람이 똑같이 채워도 한 쪽은 살아 있는 인물이 나오고 다른 쪽은 종이 인형이 나오는 일이 자주 있습니다. 표가 같으니 정보의 양은 같습니다. 칸을 메운 단어의 개수도 비슷합니다. 그런데 한 쪽은 살아 있고 다른 쪽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 차이가 어디서 오는지를 묻기 시작하면, 표 양식이 캐릭터를 만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도달합니다.
같은 대본을 받은 두 배우가 완전히 다른 인물을 빚어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연극과 영화 연기론에서 대본은 출발점일 뿐이고, 인물은 대사 밑에 깔린 속내, 곧 '서브텍스트'에서 태어난다고 봅니다. TRPG의 캐릭터 시트나 만화의 캐릭터 설정집도 마찬가지로 완성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을 적어 두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같아도 담기는 사람이 다른 셈입니다.
저희는 캐릭터를 한 명의 사람으로 다룹니다. 데이터 묶음이 아니라 충분히 살아 움직이는 존재로 두고 작업합니다. 그 자세가 표를 어떻게 채울지를 결정합니다. 같은 칸 옆에 같은 단어가 들어가도, 그 단어를 두는 손길이 한 사람의 비중을 의식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따라 결과가 갈립니다.
이 비중을 의식하는 자세, 캐릭터를 한 인간으로 다룬다는 자세가 본 강연의 첫째 기둥입니다.
분노가 아닌 애정으로
저는 캐릭터를 만들 때 한 가지를 미리 정해 둡니다. 이 작업의 동력으로 무엇을 사용할 것인가. 분노로 쓸 것인가, 애정으로 쓸 것인가.
미워하기 힘든 악역은 거의 예외 없이 애정으로 빚어집니다.
- 〈모노노케 히메〉의 에보시 고젠은 숲을 불태우는 장본인이지만, 동시에 나병 환자와 갈 곳 없는 여인들을 거두어 먹이는 지도자이기도 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를 '틀린 사람'이 아니라 '다른 정의를 가진 사람'으로 그립니다.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의 타노스는 우주의 절반을 지우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자비라 믿습니다. 손가락을 튕기기 직전의 피로한 표정에 작가가 그에게 부여한 신념의 무게가 실려 있습니다.
- 〈주토피아〉의 벨웨더 부시장이라면, 늘 작고 무시당해 온 양이기 때문에 권력을 쥐는 순간 가장 비뚤어진 방식으로 되갚으려 했을 것입니다. 악의의 뿌리에 열등감이라는 인간적 동기가 깔려 있죠.
- 〈겨울왕국〉의 엘사는 기획 초기엔 악역이었습니다. 제작진이 "이 아이는 왜 얼음을 쓰지"를 끝까지 물고 늘어진 끝에, 악당이 될 뻔한 인물이 주인공으로 바뀌었습니다.
분노는 빠릅니다. 누군가에 대한 분노, 사회에 대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는 짧은 시간에 강한 문장을 토해 냅니다. 그런 문장은 처음 읽을 때 읽는 이의 가슴을 단숨에 칩니다. 그러나 분노는 휘발성이 강합니다. 며칠 지나면 식고, 식은 분노로는 캐릭터를 끝까지 끌고 가기가 어렵습니다. 한 인물의 한 장면을 분노로 쓸 수는 있지만, 그 인물의 한 인생을 분노만으로 빚어 두면 그 인물은 며칠짜리 인물이 됩니다. 다음 책으로 넘어가면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애정은 느립니다. 한 인물에 대한 애정을 키우려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진지하게 살펴야 합니다. 그의 작은 버릇과 사소한 모순과 흠집까지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 시간이 듭니다. 그러나 그렇게 키운 애정은 오래갑니다. 그 인물을 다음 책 다음 화 다음 시즌까지 끌고 갈 수 있고, 작가가 자기 책상을 떠난 한참 뒤에도 그가 어디선가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연기론에도 같은 원칙이 있습니다. 배우들 사이에는 "스스로를 악당이라 여기는 인물은 없다"는 말이 돕니다.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 이래의 연기 훈련은 악역을 맡을 때조차 그 인물의 입장에서 정당성을 찾으라고 가르칩니다. 작가가 애정의 자리에 선다는 것은, 배우가 자기 배역을 변호하듯 인물의 안쪽으로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저희는 처음부터 애정으로 시작하기를 권합니다. 분노로 시작해도 어느 시점에는 애정으로 옮겨 가야 인물이 살아남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애정의 자리에 서서 작업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자신이 가족·연인·친구를 들여다보던 그 자세 그대로, 캐릭터를 들여다봅니다. 그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 앞에서 작아지는지, 어떤 곳에서 편안한지를 진지하게 묻습니다.
이 자세는 작업 도중 생기는 자잘한 갈등들, 이 캐릭터의 어떤 면을 살리고 어떤 면을 깎을 것인가, 어떤 결정을 내리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결정합니다. 애정의 자리에서는 깎이는 부분도 깎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분노의 자리에서는 깎이는 일이 응징처럼 됩니다. 두 작업의 결과물이 미세하게 다릅니다. 14장 강연 내내 저희는 애정의 자리에 서서 캐릭터를 들여다봅니다.
납작하게 시작해서 부풀립니다
이 자세를 가진 사람도 처음에는 곤혹스러워합니다. 한 인물을 입체적으로 만들고 싶은데, 처음부터 입체적인 인물을 그리려면 머리가 멈춰 버립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는 영화 첫 장면에서 뒷좌석에 늘어진 채 입을 삐죽이는, 한 단어로 줄이면 '겁쟁이 투정쟁이'에 가까운 평범한 소녀입니다. 그런 아이가 부모가 돼지로 변하는 사건을 겪으며 한 겹씩 단단해지고, 마지막엔 거대한 온천장에서 제 몫을 해내는 인물이 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처음부터 영웅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납작한 한 단어에 한숨씩 불어넣어 키웠을 뿐입니다.
저희는 거꾸로 합니다. 처음에는 일부러 캐릭터를 납작하게 만듭니다. 한 단어로 압축합니다. 이상주의자, 냉담한 잔존자, 조용한 증인 같은 한 줄 명명이 그것입니다. 그 한 단어로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절반도 보이지 않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만듭니다.
그 다음에 그 한 단어 위에 살을 붙입니다. 그가 누구를 사랑했는지, 무엇을 후회하는지, 자신의 어느 부분을 가장 미워하는지,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무엇을 하는지를 한 줄씩 더해 갑니다. 한 단어가 한 단락이 되고, 한 단락이 한 페이지가 되고, 한 페이지가 한 인물의 한 시기가 되어 갑니다.
처음부터 둥근 풍선을 그리려 하지 말고, 쪼그라진 풍선에 한숨씩 불어넣습니다. 풍선의 모양은 불어넣는 한숨의 결에 따라 정해집니다. 어느 쪽으로 더 부풀고 어느 쪽으로 덜 부풀지가 한 사람의 결을 만듭니다.
다른 창작 분야도 같은 순서로 일합니다. 그림은 정밀 묘사에 앞서 큰 덩어리와 실루엣부터 잡는 러프 스케치에서 출발하고, 조각은 큰 형태를 깎아 낸 뒤에야 세부로 들어갑니다. 소설 작법에서는 한 문장짜리 로그라인에서 시놉시스, 트리트먼트, 초고로 점차 살을 붙입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디테일을 그리려 들지 않는다는 점이 공통됩니다. 디테일은 골격이 선 다음에 얹는 것입니다.
이 왕복이 본 작업의 본질입니다. 한 번 납작하게 만들었다가 한 번 부풀리고, 또 다른 부분에서 한 번 납작하게 만들었다가 한 번 부풀립니다. 14장 강연이 끝날 때까지 이 왕복이 반복됩니다. 한 인물을 0에서부터 빚는 작업은 이 왕복의 누적입니다.
처음 캐릭터를 만들어 본 사람들에게서 가장 자주 듣는 곤혹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입니다. 그 곤혹의 정체는 처음부터 입체적인 인물을 그리려 한다는 점입니다. 입체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한 단어 명명은 손에 잡힙니다. 손에 잡히는 것에서 시작하는 일이 본 작업의 첫 동작입니다.
잘못된 방향을 계속 제시하라
한 가지를 미리 말씀드려야 합니다. 캐릭터를 빚는 사람은 그 캐릭터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기 쉽습니다. 그가 행복하기를, 그의 사랑이 이뤄지기를, 그의 노력이 보상받기를. 자기 손으로 만든 인물이니 당연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강할수록 그 인물이 평면화됩니다. 행복하기만 한 인물은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인물은 더 이상 살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 인물이 살아 움직이려면 변화가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으려면 갈등이 있어야 하고, 갈등이 있으려면 그가 원하는 것이 막혀야 합니다.
이야기 이론은 한목소리로 같은 말을 합니다. 로버트 맥키는 〈스토리〉에서 인물의 진짜 성격은 압박 아래 내리는 선택에서만 드러난다고 했고, 존 트루비는 강한 적대자야말로 주인공을 성장시키는 연장이라고 보았습니다. 게임 디자인의 난이도 곡선, 시나리오의 3막 구조에서 두 번째 막에 시련을 몰아넣는 관습도 모두 '인물에게 끊임없이 장애물을 준다'는 한 원리를 공유합니다.
저희는 이 일을 거꾸로 표현합니다. 캐릭터에게 잘못된 방향을 계속 제시하라. 그가 가고 싶은 길을 막고, 그가 믿고 있는 거짓을 깨뜨리고, 그가 가장 잃기 두려운 것을 위협합니다. 그래야 그가 결단해야 하는 순간이 생기고, 결단하는 순간에 그의 진짜 모습이 드러납니다.
원하는 것이 막히는 순간, 인물의 진짜 얼굴이 나옵니다.
- 〈토이 스토리〉의 우디라면 자기 자리를 빼앗기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새 장난감 버즈가 등장하자 옹졸한 질투와 거짓말로 반응합니다. 그 옹졸함이 오히려 우디를 사랑스럽게 만들죠.
- 햄릿은 '복수하라'는 과제 앞에서 칼을 빼는 대신 끝없이 망설이고 자문합니다. 그 지연이 곧 햄릿이라는 인물 자체입니다. (셰익스피어)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는 돌아갈 고향이 이미 사라졌다는 진실 앞에서, 주저앉는 대신 방향을 되돌려 싸우기로 합니다. 절망을 결단으로 바꾸는 그 한 장면이 인물의 척추가 됩니다.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소피라면 저주로 갑자기 노인이 되었기 때문에, 도리어 젊을 때는 못 하던 당돌한 말과 행동을 거침없이 합니다. 제약이 사람을 풀어 준 역설이죠.
- 같은 명제를 더 또렷이 보여 주는 예로 이해준 〈김씨 표류기〉의 김씨가 있습니다. 자살을 시도하다 한강 밤섬에 떠밀려 온 그는, 도시 한복판의 무인도라는 황당한 제약에 갇히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납니다. 짜장면 한 그릇을 손수 만들겠다는 일념이 무기력하던 남자를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꿔 놓죠.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일부러 곤경에 빠뜨립니다. 모순처럼 들리지만 캐릭터를 빚는 작업에서는 이게 일상입니다. 이 자세 없이는 한 인물이 14장 동안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캐릭터의 결점을 일부러 키우는 작업, 캐릭터의 트라우마를 일부러 들추는 작업, 캐릭터의 가장 가까운 사람을 일부러 위협 위에 올려 두는 작업, 이런 작업들이 본 강연 7·8·9장의 중심에 놓입니다. 그 장들에서 저희는 마음 약한 자세로는 캐릭터를 빚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오늘은 그 단계가 곧 옵니다는 예고만 해 둡니다.
여기까지가 저희가 이 작업에 들어설 때 가지고 들어가는 자세입니다. 다음 절부터는 이 자세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구와 함께 일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작가가 아니라 제작자
저희가 호칭을 정할 때 한 번 따로 생각해 둔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르치는 일을 누구에게 가르치는가. 우리가 만나려는 독자의 호칭은 무엇인가.
〈던전 앤 드래곤(D&D)〉: 1974년에 등장한 대표적인 테이블탑 롤플레잉 게임(TRPG)입니다. 종이 시트와 주사위를 놓고, 참가자들이 각자 맡은 인물을 직접 연기하며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갑니다. 오늘날 롤플레잉 게임 전반의 뿌리로 꼽힙니다.
게리 가이객스와 데이브 아네슨이 함께 만든 D&D의 캐릭터 시트는 종족, 직업, 힘, 민첩 같은 수치로 빼곡합니다. 그러나 그 시트는 어디까지나 출발점이지 캐릭터 자체가 아닙니다. 똑같이 '힘 18의 인간 전사'를 굴려도, 한 사람은 호탕한 술꾼 용병을 연기하고 다른 사람은 말 없는 복수귀를 연기합니다. 수치는 같아도 식탁에 앉는 인물은 전혀 다릅니다.
작가라는 호칭이 가장 자연스러워 보였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 캐릭터를 빚는 사람. 모두 작가의 일입니다. 한국어에서도 영어 author·writer에서도 그 호칭은 충분히 익숙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걸렸습니다. 작가는 텍스트를 직접 쓰는 사람을 가리키는 좁은 의미가 있습니다. 종이 앞에 앉아 한 줄 한 줄을 자기 손으로 풀어내는 사람. 그 모양이 작가의 전형적인 그림입니다.
저희가 가르치려는 사람은 그보다 넓습니다. 한 캐릭터를 시드(아이디어 한 줌)에서 출력(완성된 시트, 또는 완성된 산문)까지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 매 줄을 자기 손으로 직접 쓸 수도 있고, 어떤 줄은 다른 사람이나 다른 도구가 1차로 짜내고 자신은 검수만 할 수도 있고, 어떤 줄은 외주로 맡기고 결과만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 캐릭터의 마지막 합격선을 결정하는 사람은 한 명입니다. 그 한 명을 부를 호칭이 필요했습니다.
저희는 그를 제작자(Producer) 라고 부릅니다.
작가와 제작자의 차이는 좁고 깊은 차이입니다. 작가가 텍스트를 직접 쓰는 사람, 좁은 의미의 저자라면, 제작자는 한 콘텐츠를 시드에서 출력까지 책임지는 사람으로 도구·자료·외주를 통합 운용합니다.
영화와 방송, 게임에는 이미 이런 역할 구분이 있습니다. 영화의 감독이 현장의 연출을 맡는다면, 프로듀서는 기획부터 완성까지 전체를 책임집니다. 애니메이션의 감독과 제작 총괄, 게임의 디렉터와 프로듀서도 같은 관계입니다. 본 강연이 말하는 제작자는 한 줄 한 줄을 직접 쓰는 사람보다, 캐릭터를 시작부터 완성까지 책임지는 프로듀서 쪽에 가깝습니다.
한 사람이 두 호칭을 동시에 가질 수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한 줄 한 줄 다 쓰면서 동시에 시드부터 출력까지 책임지면, 그 사람은 작가이자 제작자입니다. 한 쪽만 가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 손으로 직접 쓰지는 않지만 캐릭터의 마지막 합격선을 정하는 사람은 작가가 아닌 제작자입니다.
본 강연이 가르치는 절차는 제작자의 의식 흐름에 맞춰 설계되어 있습니다. "한 줄을 어떻게 멋있게 쓸까"가 아니라 "한 캐릭터를 0에서 출력까지 어떻게 끌고 갈까"의 의식입니다. 둘은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같지는 않습니다. 작가의 일과 제작자의 일이 갈라지는 부분에서는 본 강연이 제작자 쪽을 따라갑니다.
이 호칭의 차이가 본 강연 내내 의미를 갖게 됩니다. 다음 절이 그 이유입니다.
AI 활용이 전제입니다
저희가 캐릭터 한 명을 빚는 표준 시간을 8시간에서 15시간 사이로 책정해 두었습니다. 듣기에 따라 길거나 짧게 들립니다. 이 시간은 사람이 손으로만 작업한다는 가정에서 나온 숫자가 아닙니다. 제작자가 AI 작업 동료와 함께 일한다는 가정에서 나온 숫자입니다.
AI 작업 동료: 초안 생성, 분류, 점검 같은 일을 함께하는 인공지능 도구를 일하는 동료처럼 부르는 말입니다. 본 강연은 제작자가 결정과 합격선 판단을 맡고, AI가 빠른 1차 산출과 반복 작업을 맡는 분업을 전제로 합니다. 운전대는 사람이 잡고, 내비게이션과 보조 엔진을 AI가 맡는 그림에 가깝습니다.
스티븐 킹은 〈유혹하는 글쓰기(On Writing)〉에서, 글을 쓸 때 늘 머릿속에 '이상적인 독자' 한 사람을 앉혀 두고 그가 어디서 웃고 어디서 지루해할지 상상하며 쓴다고 했습니다. 킹에게 그 독자는 아내 태비사였습니다. 제작자 곁의 AI 작업 동료도 이렇게 곁에 앉혀 두고 반응을 떠보는 상대에 가깝습니다. 물론 이는 비유이고, 킹이 AI를 두고 한 말은 아닙니다.
이 부분을 처음부터 분명히 해 두고 싶습니다.
저희는 이 일을 혼자서 손으로 끌고 가는 일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실제로 저희가 그렇게 일하지 않습니다. 저희는 매 단계에서 AI 작업 동료와 함께 1차 산출을 받고 그 산출을 검수하고 비틀어 다시 사용합니다. 둘째, AI 작업 동료와 함께하면 시간이 줄고, 그 시간 단축이 본 절차의 합리성을 받쳐 줍니다. 손으로만 끌면 8시간이 30시간이 되고, 30시간짜리 절차는 결국 사용되지 않습니다.
매 단계에서 무엇이 AI 활용 부분이고 무엇이 제작자 직접 작업 부분인지를 가볍게 그려 보겠습니다.
시드를 결정하는 단계에서 저희는 30종의 시드 카드를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 카드를 무작위로 섞고 5장을 뽑는 일은 무작위가 합니다. 뽑힌 카드의 키워드에 답을 다는 1차 답변은 AI 작업 동료와 함께 빠르게 짜냅니다. 그 답변 다섯 개를 한 인물로 묶을 수 있는지 시도하는 일, 어느 하나를 폐기하는 일, 최종 한 줄로 압축하는 일은 제작자가 합니다.
자기 객관화의 거울 단계에서 30개의 짧은 질문에 답하는 1차 답변은 AI 작업 동료가 맡는 부분입니다. MBTI 네 글자에서 두 글자를 골라 한 단어 정체성을 뽑는 일은 제작자 직접 작업입니다.
MBTI: 사람의 성향을 네 개의 축, 모두 16가지 유형의 알파벳 코드로 나누는 대중적 성격 분류 도구입니다. 창작에서는 심리 진단이 아니라 인물의 결을 잡는 참고 틀로 가볍게 쓰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인물은 계획형(J)인가 즉흥형(P)인가" 정도로 출발점만 잡고, 나머지는 인물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캐릭터가 자기 자신을 1500자 단편으로 쓰는 단계가 일상단면 시나리오입니다. 거기서 1차 초고도 AI 작업 동료와 함께 씁니다. 그 초고가 캐릭터의 톤과 일치하는지 검수하고 합격선을 통과시키는 일은 제작자입니다.
매 단계가 이런 식입니다. AI 활용이 강한 부분은 빠른 1차 산출과 양식 변환과 반복 작업입니다. 제작자가 강한 부분은 결정·압축·합격선 판단입니다. 두 부분을 분리해 두지 않으면 어느 쪽도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본 강연 14장은 매 장마다 그 분담을 자연스럽게 안내합니다.
저희가 어느 모델의 어떤 도구를 쓰는지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습니다. 그건 저희 내부 도구의 이야기이고, 본 강연의 주제와 다른 영역에 놓여 있습니다. 다만 캐릭터를 빚는 일이 제작자의 손으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 그리고 매 단계에서 제작자의 부분과 AI 작업 동료의 부분이 다르다는 사실 이 두 가지는 본 강연 내내 전제로 놓입니다.
이 자세는 본 강연의 두 번째 기둥입니다. 첫째 기둥은 캐릭터를 한 인간으로 다룬다는 자세입니다. 둘째 기둥은 그 일을 제작자가 AI 작업 동료와 함께 끌고 간다는 사실입니다. 두 기둥 위에서 본 강연 14장이 진행됩니다.
14장의 지도
앞으로 14장의 흐름을 미리 보여 드립니다. 1·2·3장이 자세와 골격으로, 1장 자세 잡기, 2장 시드에서 출력까지 12 단계 흐름, 3장 위계와 사전 준비 5 모듈. 4장부터 본격 작업이 시작되어 4장 시드 결정(외부 시드와 30 카드), 5장 자기 객관화의 거울 다섯 척도, 6장 일상단면 시나리오 1500자 단편 모의. 7·8·9장은 캐릭터 입체화로 클리셰의 거꾸로와 신체 앵커, 결점·결핍·트라우마, Want·Need·Lie 세 줄. 10·11·12장은 관계와 출력으로 캐스트 다섯 사람, 빙의 몰입 운용, 다섯 매체(라이브러리·TRPG·시나리오·애니·웹소설) 출력. 13장은 비전형 캐릭터(AI 챗봇·VTuber·교육·치료·아동), 14장은 다섯 진단과 마지막 인사.
지도에 미리 등장한 낯선 말들을 짧게 풀어 둡니다. 본문은 각각 해당 장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시드: 캐릭터를 시작하게 하는 핵심 아이디어 한 줄. 클리셰: 너무 자주 쓰여 익숙해진 설정이나 인물 유형. 신체 앵커: 추상적인 성격을 몸의 습관이나 흉터, 감각으로 고정하는 장치. Want·Need·Lie: 인물이 겉으로 원하는 것, 진짜 필요한 것, 스스로 믿고 있는 거짓을 가리키는 세 축. 빙의 몰입: 제작자가 인물의 시점으로 들어가 직접 말하고 행동해 보는 작업.
14장을 관통하는 두 줄이 있습니다. 한 캐릭터를 빚는 일은 한 인간을 충분히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고, 그 일은 제작자가 AI 작업 동료와 함께 끌고 갑니다. 다음 장에서 시드에서 출력까지의 12 단계 흐름을 한 번에 펼쳐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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