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DONG-EUN · 세계관설계자 (15편)
설계의 요소와 작업 원리
10편. 설계의 요소와 작업 원리
부품을 알았으니 공정으로 간다. 3부 방법론의 첫 편은 설계 작업 전체의 지도를 그린다. 세계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작업은 어디서 시작해 어떤 성질로 진행되는가, 최종적으로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가. 10편의 관통 질문은 이것이다: 설계는 무엇부터 시작하는가. 답은 요소의 전모를 파악하고, 팔 곳을 고르고, 만들 것의 목록을 확정하는 순서로 전개된다.
1. 설계의 요소들: 전체 지도
먼저 세계를 이루는 요소의 전모를 펼친다. 세계관 설계의 대상은 크게 여덟 계열로 정리할 수 있다: 지리와 환경, 역사와 연대기, 자연법칙과 초자연, 사회와 제도, 경제와 산업, 문화와 풍속, 언어와 명칭, 인물과 세력. 각 계열은 다시 세부 항목으로 갈라진다. 사회와 제도만 해도 신분, 법, 행정, 군사, 교육, 종교가 그 아래에 있다. 이 지도의 용도는 완주가 아니라 점검이다. 여덟 계열을 전부 채운 세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필요도 없다. 본말전도의 원리대로 세계관은 낭비를 품지만, 그 낭비조차 지도 위에서 관리되어야 한다. 지도의 실무 기능은 세 가지다. 첫째, 누락의 발견이다. 유형이 요구하는 필수 계열이 비어 있는지 점검한다. 무협을 표방하면서 세력 계열이 빈 세계는 강호가 없는 무협이다. 유형마다 필수 계열의 조합이 다르므로, 유형론의 지식이 여기서 점검표로 환금된다. 둘째, 편중의 진단이다. 창작자의 취향은 특정 계열로 쏠리기 마련이라, 지도가 있어야 연표만 백 년 치 쌓이고 경제는 백지인 상태를 조기에 본다. 편중 자체는 죄가 아니다. 모르는 편중만이 죄다. 셋째, 분업의 기준이다. 여러 명이 설계에 참여할 때 계열은 자연스러운 업무 분장의 단위가 된다. 지도는 채우라는 명령서가 아니라 어디를 안 채웠는지 아는 상태를 유지시키는 계기판이다. 빈칸의 목록이 곧 위험의 목록이자 기회의 목록이다.
2. 네 개의 축: 분류 기준에서 설계 변수로
여덟 계열의 지도 위에 좌표계를 하나 얹는다. 유형론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축으로 세계들을 분류했다. 이제 그 두 축에 자연법칙과 철학을 더해 네 개의 축을 완성한다. 시간 축은 세계가 언제이며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가, 공간 축은 세계가 어디이며 얼마나 큰가, 자연법칙 축은 무엇이 가능하고 불가능한가, 철학 축은 그 세계가 무엇을 옳고 값지다고 여기는가를 맡는다. 유형론에서 분류의 기준이었던 축들이 여기서는 설계의 변수로 지위가 바뀐다. 분류할 때는 완성된 세계를 축 위의 한 점으로 읽었지만, 설계할 때는 축의 값을 직접 정한다. 넷 중 앞의 셋은 유형론이 충분히 다뤘으니, 새로 온 철학 축만 짚는다. 철학 축은 세계의 가치 체계다. 무엇이 명예이고 무엇이 수치인가, 죽음은 무엇으로 여겨지는가, 강함과 선함 중 무엇이 존경받는가. 이 축이 인물들의 판단 기준과 갈등의 성분을 결정하며, 같은 사건도 철학 축의 값에 따라 비극과 희극으로 갈린다. 결투에서의 죽음이 명예인 세계와 낭비인 세계는 같은 장면을 정반대로 연출하게 만든다. 사무라이물이 증명했듯 규범의 체계 하나가 장르 하나를 만든다. 시사점은 네 축의 명시적 확정이다. 설계 초기에 축마다 한 문단씩, 이 세계의 값을 선언하는 문서를 만든다. 이 네 문단이 이후 모든 세부 설정의 상위 헌법이 된다. 세부에서 판단이 갈릴 때마다 축의 선언문으로 돌아와 대조하면, 세계의 결이 유지된다.
3. 진입시점: 설계는 언제 시작되는가
좌표계를 세웠으면 다음은 시점의 문제다. 설계자가 세계에 투입되는 시점은 프로젝트마다 다르고, 시점이 다르면 같은 직무라도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진입시점은 셋으로 나뉜다. 첫째, 기획 단계의 진입이다. 아무것도 없는 백지에서 세계를 짓는 경우로, 인위적 세계관의 정석 경로다. 자유가 최대인 대신 검증이 전무하므로, 작은 산출물로 빨리 시장 반응을 볼 구조를 함께 설계해야 한다. 둘째, 연재 중의 진입이다. 살아 움직이는 작품에 올라타는 경우로, 가장 흔하고 가장 어렵다. 설정은 이미 쌓이는 중이고 마감은 멈추지 않는다. 이때의 첫 업무는 창작 지원이 아니라 지혈이다. 새 설정의 등재 관문부터 세워 모순의 증식 속도를 늦추고, 그다음에 기존 설정의 정리로 들어간다. 순서를 뒤집으면 정리하는 속도보다 어질러지는 속도가 빠르다. 응급실의 원칙과 같다. 출혈부터 잡고 수술은 그다음이다. 셋째, 완결 후의 진입이다. 끝난 작품을 IP로 재정비하는 경우로, 자연발생적 세계관의 사후 체계화다. 시간 압박이 없는 대신 원작자의 기억이 식어 있고, 팬덤의 파논이 이미 영토를 넓힌 상태라는 변수를 다룬다. 완결 후의 정리는 그래서 문헌 작업이면서 동시에 팬덤과의 외교다. 시사점은 진입시점의 자가 진단이다. 지금이 셋 중 어느 국면인지 확정하는 것이 작업 계획서의 첫 줄이어야 한다. 국면마다 첫 산출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백지에는 축의 선언문, 연재 중에는 등재 관문, 완결 후에는 전수 조사 계획.
4. 원작의 유무: 두 개의 출발점
진입시점과 겹치면서 다른 문제가 원작의 유무다. 설계의 출발점은 크게 둘이고, 두 출발점은 정반대의 공정을 요구한다. 원작이 있는 설계는 발굴에서 시작한다. 소설이든 게임이든 이미 존재하는 작품이 세계의 일차 사료다. 작품을 다시 읽으며 설정을 캐내고, 흩어진 언급을 대조하고, 행간의 암시를 판정하는 일이 초기 공정의 전부다. 이 공정의 성패는 원작 존중의 규율에 달려 있다. 발굴자는 사료 위에 자기 상상을 덧그리려는 유혹을 받는데, 원작과 정리본이 어긋나는 순간 정리본의 권위는 사라진다. 발굴과 창작을 섞은 문서는 어느 항목도 믿을 수 없는 문서가 된다. 원작이 없는 설계는 결정에서 시작한다. 캐낼 사료가 없으므로 모든 것을 정해야 하는데, 전부를 동시에 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무엇부터 결정하는가의 순서가 공정의 핵심이 되고, 그 답이 앞의 네 축이다. 축의 값을 먼저 선언하고, 축에 비추어 세부를 결정해 내려간다. 두 출발점은 문서의 성격도 가른다. 원작 기반의 문서는 출처 표기가 생명이라 모든 항목에 근거 회차와 페이지가 달리고, 무원작 문서는 결정 이력이 생명이라 모든 항목에 결정일과 결정 사유가 달린다. 시사점은 혼합형의 경계다. 실무의 다수는 원작이 조금 있는 상태이며, 이때는 발굴분과 신규 결정분을 표기로 구분해 관리해야 한다. 원작 근거 항목과 신규 확정 항목의 표식만 달아도 문서의 신뢰 문제 대부분이 예방된다.
5. 점진적 구체화: 어디부터 파는가
출발점이 정해지면 파기 시작한다. 세계관의 형성은 한 번에 완성되지 않고 점진적으로 구체화된다. 문제는 방향이다. 전 영역을 같은 깊이로 파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어디를 먼저 깊게 팔지의 우선순위가 필요하다. 기준은 이미 나와 있다. 디테일의 원리가 말한 길목, 곧 이야기가 자주 지나갈 자리다. 이를 공정으로 옮기면 수요 예측이 된다. 예정된 작품들의 무대, 주인공의 소속과 동선, 반복 등장할 제도와 세력을 목록화하면 그것이 우선 굴착 지점의 목록이다. 수요 문서가 없으면 우선순위는 취향이 정하게 된다. 굴착의 방식은 백동화의 방식이다. 길목 위의 사물 하나를 잡고 그 내력을 파면, 화폐에서 광산으로, 광산에서 세금으로 이어지는 연쇄가 주변 설정을 함께 끌어올린다. 개별 항목을 고립적으로 채우는 것보다 연쇄를 따라 파는 쪽이 정합성 검증을 겸하므로 효율이 높다. 주의할 것은 깊이의 상한이다. 파기 시작한 구멍은 흥미로워서 계속 파게 되는데, 수요 없는 깊이는 놀음의 시작이다. 시사점은 굴착 단위의 시간 상자다. 한 지점의 구체화에 배정하는 작업량을 미리 정해두고, 소진되면 다음 길목으로 이동한다. 얕게 넓히는 국면과 깊게 파는 국면을 의식적으로 교대하는 리듬이 점진적 구체화의 실무 형태다. 리듬 없이 파는 사람은 반드시 한 구멍에서 발견된다.
6. 복합적 확장: 범위가 넓어지는 방식
깊이가 점진이라면 넓이는 복합이다. 세계관의 범위는 한 방향으로 자라지 않고 복합적으로 확장된다. 하나의 설정은 인접 분야의 설정을 소환하기 때문이다. 화폐를 정하면 경제가 소환되고, 경제를 정하면 국가가, 국가를 정하면 외교와 전쟁이 따라온다. 여덟 계열의 지도에서 보면, 한 계열의 항목이 다른 계열들로 촉수를 뻗는 구조다. 이 확장은 세계에 유기성을 주는 원천이면서 동시에 통제를 잃기 쉬운 지점이다. 소환에 전부 응하면 작업은 발산한다. 화폐 하나 정하려다 대륙 전체의 무역사를 쓰게 되는 것이 이 직무의 흔한 조난이다. 조난자는 대개 성실한 사람이다. 성실함일수록 통제 도구가 필요하다. 통제의 도구는 해상도의 차등이다. 경계 처리에서 익힌 저해상도의 기법을 내부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소환된 인접 설정은 일단 저해상도로, 곧 이름과 한 줄 요약만으로 응답해두고, 그 자리에 미상세 표식을 남긴다. 표식의 목록이 곧 다음 굴착 후보의 대기열이 된다. 이렇게 하면 연쇄는 기록되되 작업은 발산하지 않는다. 시사점은 확장 이력의 가시화다. 이번 주에 세계가 어느 방향으로 몇 항목 자랐는지를 집계하면, 편중의 진단과 다음 우선순위 판단이 자료 위에서 이루어진다. 확장은 막을 일이 아니라 계기판에 올릴 일이다. 낭비의 관리라는 1편의 숙제가 여기서 구체적인 도구를 얻는다.
7. 자료조사와 세계관 작업의 차이: 판별 기준
여기까지의 공정 서술로 오래된 혼동 하나를 정리할 수 있다. 자료조사와 세계관 작업의 구분이다. 원리는 1편에서 확정했다. 필요한 만큼만 정확하게 요구되면 자료조사이고, 낭비를 필수로 품으면 세계관이다. 이를 실무의 판별 기준으로 번역하면 요구의 성질을 보면 된다. 요구가 닫혀 있는가, 열려 있는가다. 닫힌 요구는 답의 형태가 정해져 있다. 조선 후기 포도청의 직제를 정리해달라는 요구에는 정답이 있고, 작업은 그 정답의 수집으로 완결된다. 열린 요구는 답이 생성되어야 한다. 이 세계의 치안 제도를 만들어달라는 요구에는 정답이 없고, 결정과 그 결정의 파급 관리가 작업의 몸통이 된다. 같은 프로젝트 안에서도 두 성질의 일은 섞여 들어온다. 역사물의 세계관 작업은 대부분 닫힌 요구이고, 판타지의 작업은 대부분 열린 요구이며, 팩션은 정확히 반반이다. 공백 지도의 안쪽이 열린 요구, 바깥의 고정점이 닫힌 요구에 해당한다. 판별이 중요한 이유는 공정과 인력과 견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닫힌 요구는 조사력과 출처 관리가 핵심이라 리서처의 일에 가깝고, 열린 요구는 결정과 정합성 관리가 핵심이라 설계자의 일이다. 시사점은 접수 단계의 분류다. 들어오는 요구마다 닫힘과 열림을 태깅하는 것만으로 업무의 배분과 예측이 한결 정확해진다. 닫힌 일을 설계자에게, 열린 일을 리서처에게 맡기는 혼선이 이 직군 소모의 큰 원인이다.
8. 스펙 리스트: 만들 것의 목록
공정의 통제 도구들을 하나로 묶는 문서가 스펙 리스트다. 스펙 리스트는 이 프로젝트에서 만들기로 확정한 산출물의 목록이다.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 이번에 만들 것의 목록이라는 점이 핵심이다. 항목은 산출물 단위로 적는다. 대륙 지도 1종, 주요 세력 5개의 개요서, 주인공 소속 조직의 상세 설정, 연표 초안, 용어집 1차분. 각 항목에는 해상도 등급과 마감과 담당이 붙는다. 이 문서의 효능은 세 방향이다. 첫째, 발주자와의 계약 장치다. 세계관을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범위가 무한이라 분쟁의 씨앗이지만, 스펙 리스트에 서명받으면 범위가 유한해진다. 추가 요구는 리스트의 개정으로 처리되어 견적의 근거가 남는다. 무한한 일을 유한한 계약으로 바꾸는 것이 이 문서의 첫 번째 존재 이유다. 둘째, 낭비의 관리 장치다. 리스트 밖의 작업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리스트 밖임을 알고 하는 낭비와 모르고 하는 낭비는 다르며, 전자만이 관리되는 낭비다. 셋째, 진척의 계기판이다. 세계관 작업은 끝이 안 보이는 일이라는 인상이 사기를 갉는데, 리스트는 완료라는 상태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준다. 끝나는 일의 목록이 있어야 끝나지 않는 일을 버틸 수 있다. 시사점은 리스트의 주기적 갱신이다. 스펙 리스트는 착수 때 한 번 쓰는 문서가 아니라 확장 이력을 반영해 개정을 거듭하는 살아 있는 계약서다.
9. 산출물 규격: 전달 가능한 형태의 조건
스펙 리스트의 각 항목이 완료로 인정받으려면 규격을 통과해야 한다. 산출물 우선주의가 선언이었다면 여기서는 그 규격의 내용을 확정한다. 전달 가능한 산출물의 조건은 검색, 인용, 추적이었다. 이를 문서 규격으로 번역하면 다음이 된다. 첫째, 항목화다. 산출물은 줄글 덩어리가 아니라 표제를 가진 항목의 집합이어야 한다. 항목이 있어야 검색이 성립한다. 둘째, 표제의 규칙성이다. 같은 대상은 언제나 같은 이름으로 표기된다는 원칙으로, 표기가 흔들리면 검색은 있어도 신뢰가 없다. 셋째, 출처 또는 결정 이력이다. 원작 기반이면 근거 위치가, 신규 결정이면 결정일과 사유가 항목마다 달려야 인용이 성립한다. 넷째, 판본 표기다. 문서 전체와 개별 항목에 버전이 있어야 추적이 성립하며, 받은 쪽이 자기 판본의 신선도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다섯째, 요약층의 존재다. 모든 독자가 전문을 읽지 않으므로, 항목마다 한 줄 요약이, 문서마다 개요가 있어야 한다. 이 다섯 조건은 화려한 문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표 계산 시트 하나로도 전부 충족할 수 있고, 실제로 실무의 표준 도구는 위키와 시트다. 규격은 도구의 화려함이 아니라 조건의 충족에서 나온다. 시사점은 규격의 조기 확정이다. 첫 산출물을 내기 전에 이 규격부터 합의해두면, 이후의 모든 작업물이 자동으로 호환된다. 규격의 소급 적용은 신규 적용의 몇 배 비용이 든다.
10. 작업 사이클: 추출, 정의, 등재
지도와 좌표와 목록과 규격이 갖춰졌다. 마지막으로 이 위에서 도는 작업의 기본 회로를 확정한다. 세계관 작업의 최소 사이클은 세 동작의 순환이다. 추출, 정의, 등재다. 추출은 원천에서 설정 후보를 뽑아내는 동작이다. 원작의 문장에서, 자료의 더미에서, 회의의 발언에서, 세계에 편입될 가능성이 있는 조각을 건져 목록에 올린다. 정의는 건져낸 후보의 뜻을 확정하는 동작이다. 이 세계에서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며 무엇이 아닌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를 결정한다. 등재는 정의된 항목을 정본 문서에 올리는 동작이다. 기존 항목들과의 충돌 검사를 통과한 항목만이 등재되며, 등재된 것만이 세계의 공식 구성원이 된다. 캐넌의 실무적 정의가 바로 이것, 등재를 통과한 항목의 집합이다. 이 사이클은 규모와 무관하게 반복된다. 백지 설계의 첫 주에도, 십 년 된 세계의 유지 보수에도, 돌아가는 회로는 같다. 앞서 본 모든 국면이 이 회로의 변주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원작 발굴은 추출이 비대한 사이클이고, 무원작 설계는 정의가 비대한 사이클이며, 연재 중의 지혈은 등재 관문의 긴급 설치였다. 세 동작은 각자 고유한 기술 체계를 가지므로, 이어지는 세 편이 하나씩 맡는다. 추출의 기술이 키워드론이고, 정의의 기술이 정의와 네이밍이며, 등재의 기술이 데이터 파이프라인이다. 회로 하나를 세 개의 공구 상자로 나눠 담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