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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 DONG-EUN · 뉴콘텐츠 BM과 IP 확장 경제 (30편)

음악의 탄생 공연에서 레코드까지, 소리에 값을 매기다

김동은WhtDrgon. · 16편

16편. 음악의 탄생 - 공연에서 레코드까지, 소리에 값을 매기다

지불 습관의 족보 - 뉴콘텐츠 BM을 위한 역사적 힌트북 2권 · 16편

소리는 원래 소유할 수 없었다

그림은 벽에 걸 수 있습니다. 책은 서가에 꽂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소리는? 연주가 끝나면 사라집니다. 코인을 넣으면 게임이 시작되듯, 음악은 존재하는 동안만 존재했습니다.

1877년 이전까지 음악에 돈을 내는 방법은 하나였습니다. 공연장에 가는 것. 연주자가 있는 장소에 있어야 했습니다. 음악의 BM은 근본적으로 시간과 장소에 묶여 있었습니다.

이 제약이 음악산업의 첫 번째 지불 습관 공간을 만들었습니다. "공연에 가는 것." 입장권을 사는 것. 그리고 이 공간이 축음기의 발명으로 깨지는 순간, 음악산업의 300년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귀족의 후원 - 최초의 음악 BM

18세기 유럽에서 음악가는 주로 교회나 귀족 가문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바이마르 궁정의 악장으로 일했고,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합창장)로 28년을 보냈습니다. 급여는 고용주(교회 또는 귀족)로부터 나왔습니다. 음악을 감상하는 사람과 돈을 내는 사람이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바흐의 라이프치히 시절 연봉은 약 700탈러(Thaler)이었습니다. 이는 당시 숙련 장인 연봉의 3~4배에 해당하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급여에는 의무가 따랐습니다. 교회 예배와 시 행사를 위한 음악을 연간 50곡 이상 납품해야 했습니다. 결제 구조로 보면 오늘날의 전속 계약에 가깝습니다. 고용주가 창작물에 대한 독점 권리를 가지고, 창작자는 안정적 급여를 받는 구조.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Franz Joseph Haydn, 1732~1809)**은 이 구조의 또 다른 전형입니다. 헝가리 에스터하지(Esterházy) 후작 가문에 30년간 고용됐습니다. 계약 조건은 구체적이었습니다. 주 2회 오케스트라 공연 운영, 연간 오페라 제작. 하이든은 이 기간 동안 104개의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안정적 고용이 대규모 창작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 구조가 후원자(patron) 시스템입니다. 귀족이 음악가를 먹여 살리는 대가로, 귀족은 자신의 살롱에서 음악을 독점적으로 즐겼습니다. 결제 구조로 보면 이것은 "구독"에 가깝습니다. 귀족은 음악가를 연간 단위로 계약하고, 필요할 때마다 음악 서비스를 받았습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는 이 시스템에 반기를 든 첫 번째 음악가였습니다.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의 악장직을 포기하고 빈으로 나와 독립 음악가로 살기 시작했습니다. 독립 초기 2년간 모차르트는 귀족 자제에게 피아노 레슨을 제공했습니다. 수강생 1명당 6두카텐(ducat)이 월 레슨비였고, 귀족 살롱 공연까지 합산하면 연수입이 약 3,000굴덴에 달한 해도 있었습니다. 이는 바흐의 교회 연봉보다 네 배 이상 높은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독립은 수입의 불안정을 의미했습니다. 1784년 이후 모차르트의 수입은 불규칙해졌고, 부채가 급증했습니다. 후원자가 없으면 공연이 없었고, 공연이 없으면 수입이 없었습니다. 모차르트가 35세에 사망한 것은 방탕한 생활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는 구조가 더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공연 투어와 스타 시스템 - 팬덤 결제의 원형

19세기 초, 공연 시스템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귀족 살롱이 아닌 공개 콘서트홀이 등장했고, 누구나 입장권을 살 수 있게 됐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와 함께 스타가 탄생했습니다.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는 바이올린 연주자였습니다. 그는 귀족의 궁정이 아닌 공개 콘서트홀에서 공연했습니다. 그의 연주 기술은 당시로서는 전설적이었고,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공연했습니다. 입장권 가격은 일반 연주회보다 3배에서 5배 높았습니다. 그럼에도 좌석은 매진됐습니다.

파가니니의 수익 규모는 기록으로 확인됩니다. 18311834년 영국 투어에서 공연 한 회당 수익이 200파운드 이상이었습니다. 당시 일반 노동자의 연봉이 2030파운드 수준이었으므로, 공연 한 번의 수익이 일반 노동자 연봉의 10배에 달한 셈입니다. 3년 영국 투어 총수익은 약 10만 파운드로 추정됩니다(당시 보도 기준).

파가니니가 만든 것은 공연 티켓이 아닙니다. 스타에 대한 지불 습관입니다. "이 사람의 연주를 보기 위해서라면 더 내도 좋다"는 심리. 이 습관은 이후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즈, BTS로 이어지는 팬덤 경제의 원형이 됐습니다.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갔습니다. 리스트는 1839년부터 1847년까지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1,000회 이상의 공연을 소화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리스트는 처음으로 "독주 리사이틀" 형식을 정착시켰습니다. 다른 연주자 없이 혼자 무대에 서는 방식. 그때까지 콘서트는 여러 연주자가 함께 하는 형식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리스트는 자신 한 명이 전체 공연을 채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스트의 공연에서 여성 팬들이 리스트가 쓰던 장갑이나 담배꽁초를 수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언론은 이 현상을 "리스토마니아(Lisztomania)"라고 불렀습니다. 스타의 소지품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팬 문화의 원형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공연 흥행의 또 다른 모델은 **P.T. 바넘(Phineas Taylor Barnum, 18101891)**이 보여줬습니다. 흥행업자 바넘은 "스웨덴의 나이팅게일"로 불리던 소프라노 **제니 린드(Jenny Lind, 18201887)**의 1850~1852년 미국 투어를 기획했습니다. 바넘은 이 투어로 총수입 50만 달러 이상을 챙겼습니다. 아티스트보다 흥행사가 더 많은 몫을 가져가는 이 구조는 이후 레이블과 아티스트 사이의 수익 분배 구조를 예고합니다.

리스트는 공연뿐 아니라 악보를 출판해서 수익을 얻었습니다. 악보를 사서 직접 연주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리스트의 연주를 보러 공연장에 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두 가지 지불 공간이 공존했습니다.

이 구조는 K-pop의 앨범+공연 이중 구조와 닮아있습니다. 음악을 기록물로 구매하는 것과 스타를 직접 보기 위해 공연장에 가는 것이 별개의 지불 습관 공간이었습니다.

악보 출판 - 최초의 음악 물리적 상품화

공연이 있고 축음기가 있기 전, 음악을 물리적 형태로 판 방법이 있었습니다. 악보입니다.

17~18세기, 인쇄 기술이 발전하면서 악보 출판이 가능해졌습니다. 작곡가들은 자신의 곡을 악보로 출판해서 판매했습니다. 구매자는 그 악보를 집에서 직접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음악을 "소유"하는 첫 번째 방법이었습니다.

리스트와 쇼팽은 악보 출판으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습니다. **프레데리크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의 피아노 에튀드 Op.10은 1833년 출판됐습니다. 쇼팽은 이 작품을 프랑스(슐레싱거 출판사), 독일(브라이트코프 운트 헤르텔, Breitkopf & Härtel), 영국(웨셀 출판사) 세 나라에 동시 출판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당시 국제 저작권법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각 나라 출판사로부터 별도 판권료를 받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한 작품으로 세 나라에서 각각 수익을 올리는 구조였습니다. 이 동시 출판 전략은 당시로서는 드문 수익 극대화 방식이었습니다.

쇼팽은 파리 살롱에서 귀족들을 위한 연주와 레슨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악보 판매도 중요한 수입원이었습니다. 그의 피아노 에튀드, 녹턴, 폴로네즈는 출판사가 유럽 전역에 유통했습니다. 구매자는 악보를 사서 자신이 직접 연주하거나, 가정의 음악 선생님에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불 구조로 보면 악보 출판은 흥미로운 전이입니다. "공연에 가는 지불 습관" → "음악을 가지고 오는 지불 습관". 악보는 음악을 물건으로 만든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었습니다. 악보를 사도 연주할 수 있는 사람만 음악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사람에게 악보는 의미가 없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이후 피아노 보급이 확대되면서 악보 시장도 커졌습니다. 중산층 가정에 피아노가 들어오고,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것이 교양의 표시가 됐습니다. 악보 판매는 이 피아노 교육 시장과 연결됐습니다. 악보 출판사들은 유명 작곡가의 곡뿐 아니라 교육용 곡집, 연습곡 모음을 출판했습니다.

한국에서 서양식 악보가 처음 보급된 것은 1900년대 초 일본 통감부 시기였습니다. 1920~1930년대에는 조선음악협회가 설립됐고, 당시 대중가요 악보집이 서점에서 판매됐습니다. 악보 시장이 형성되기까지 서양보다 약 100년의 시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악보 시장의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연주 능력이 있는 사람만 구매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중 전체를 고객으로 만들려면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습니다. 1877년, 에디슨의 축음기가 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축음기 - 소리가 처음으로 물건이 되다

1877년, 미국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축음기(phonograph)를 발명했습니다. 소리를 실린더 형태의 레코드에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계였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바꿨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축음기 이전에 음악은 시간과 장소에 묶여 있었습니다. 음악가가 있는 곳에 있어야 했습니다. 축음기 이후, 음악은 물건이 됐습니다. 구매하고, 소유하고, 언제든 재생할 수 있게 됐습니다.

지불 습관의 전이가 일어났습니다. "공연 입장권을 사는 습관" → "물건을 사는 습관". 이 전이가 음악산업의 첫 번째 대전환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축음기를 발명했지만, 음악용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1878년 첫 상업 모델 출시 당시, 에디슨은 축음기를 월 20달러에 임대하는 방식으로 사업화를 시도했습니다. 주된 판매 대상은 사업가들이었습니다. 구술 기록용, 즉 오늘날의 녹음기 역할이었습니다. 음악을 녹음해서 판다는 발상은 나중에 추가됐습니다.

최초의 상업 녹음 스튜디오는 1894년 **에디슨 레코드(Edison Records)**가 뉴저지에 구축한 시설입니다. 초기 녹음 세션 비용은 1시간 기준 5달러 수준이었습니다. 당시 일반 노동자 하루 임금이 1~1.5달러였으므로, 녹음 자체가 상당한 비용을 요구했습니다. 이 비용 구조가 초기 음악 녹음 시장이 클래식 음악가와 오페라 가수 중심으로 형성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실패 사례: 에디슨 vs 베를리너 - 표준 전쟁에서 진 쪽

1887년, 독일 출신 미국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Emile Berliner, 1851~1929)**가 플랫 디스크(flat disc)를 발명했습니다. 에디슨의 실린더 레코드와는 다른 형식이었습니다. 원통형이 아닌 납작한 원반 형태. 이것이 오늘날 LP의 원형입니다.

두 형식이 시장에서 경쟁했습니다. 에디슨의 실린더 vs 베를리너의 플랫 디스크.

기술적으로는 실린더가 음질이 더 좋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플랫 디스크가 결정적 우위를 가진 것이 있었습니다. 대량 생산이었습니다. 실린더는 하나씩 녹음해야 했습니다. 원반은 하나를 녹음하면 금형을 만들어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같은 공연을 수만 장 복제할 수 있었습니다.

이 차이가 승패를 갈랐습니다. **RCA 빅터(RCA Victor)**가 베를리너의 플랫 디스크 방식을 채택하면서 업계 표준이 됐습니다. 에디슨은 실린더 포맷을 고수했습니다. 1929년, 에디슨의 음반 사업은 문을 닫았습니다.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의 사례도 비슷합니다. 컬럼비아는 처음에 실린더 레코드를 고수했습니다. 시장이 플랫 디스크로 기울어진 후에야 전환했습니다. 컬럼비아는 살아남았지만, 표준 전쟁에서 뒤처진 시간 동안 시장 주도권을 잃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보이는 패턴이 있습니다. 기술적 우월성과 시장 표준화 능력은 별개입니다. 베타맥스(Betamax)가 VHS에 패배한 것, HD DVD가 블루레이에 패배한 것이 같은 패턴입니다. 기술이 아닌 유통과 표준화 능력이 승패를 결정했습니다.

LP와 카세트테이프 - 복사 가능한 매체가 흔들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한 후, 음악 산업의 지불 단위는 빠르게 변화했습니다. 초기 실린더 레코드는 한 곡 또는 두세 곡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지불 단위는 "곡 단위"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플랫 디스크가 보편화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한 장의 레코드에 담을 수 있는 음악의 양이 늘었습니다.

그리고 1948년, **컬럼비아 레코드(Columbia Records)**가 33⅓rpm의 장시간 레코드를 선보였습니다. 한 면당 23분 이상 수록이 가능했습니다. 기존 78rpm 레코드가 한 면에 35분을 담을 수 있었던 것과 달리, 새 포맷은 한 면에 20분 이상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롱 플레이(Long Playing)", 줄여서 LP라고 불렀습니다. 첫 출시 당시 LP 가격은 10인치 팝 음반 2.85달러, 12인치 클래식 음반 4.85달러였습니다. 당시 78rpm 싱글이 35센트였으니, LP는 싱글보다 약 811배 높은 가격이었습니다.

LP는 단순한 기술 개선이 아니었습니다. 앨범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이전의 단편적인 단곡 위주 판매에서, 아티스트가 하나의 주제로 엮인 여러 곡을 한 번에 묶어서 제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1965년 비틀즈의 《Rubber Soul》, 1966년 《Revolver》, 1967년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는 개별 곡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경험으로 설계됐습니다. 청취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듣도록 설계된 음악적 여정을 구매했습니다.

LP 출시 다음 해인 1949년, **RCA 빅터(RCA Victor)**는 컬럼비아에 대항해 45rpm 소형 싱글을 발표했습니다. 이 "포맷 전쟁"은 2년간 지속됐습니다. 결국 시장은 LP(앨범용)와 45rpm 싱글이 공존하는 방식으로 정착했습니다. 아티스트는 싱글로 대중에게 다가가고, 팬들은 앨범으로 더 많은 돈을 지불하는 이중 구조가 굳어진 것입니다.

지불 단위로 보면 이 변화가 의미심장합니다. "마음에 드는 곡 하나" → "아티스트가 제시하는 경험 전체". 게임산업에서 단편 아케이드 게임에서 수십 시간짜리 RPG 패키지로의 전환과 비슷한 흐름입니다. 소비자가 더 많은 돈을 내고 더 큰 묶음을 구매하는 방향으로의 이동.

LP 구매에는 "소유"의 의미가 강했습니다. 레코드판을 산다는 것은 그 음악을 영구적으로 가진다는 의미였습니다. 서가에 꽂아둔 책처럼, 레코드 진열대는 취향과 교양의 표시였습니다. 어떤 앨범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나타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구레코드(地球레코드, 1948년 설립)**와 **오아시스레코드(1963년 설립)**가 LP 시장을 주도했습니다.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1964년)는 국내 음반 역대 최다 판매 기록과 관련해 자주 언급됩니다. 공식 집계 수치가 남아 있지는 않으나, 당시 음반 시장에서 이 앨범의 판매량이 이례적인 규모였다는 점은 당시 언론 보도에서 확인됩니다.

1963년, **필립스(Philips, 네덜란드)**가 콤팩트 카세트테이프를 출시했습니다. 더 작고 더 휴대하기 편한 매체였습니다. 필립스는 초기에 카세트 특허를 무료로 공개했습니다. 특허 수익보다 빠른 표준화를 택한 전략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카세트테이프는 빠르게 업계 표준이 됐습니다.

그런데 카세트테이프는 LP와 결정적으로 다른 특성이 있었습니다. 복사가 가능했습니다.

LP를 카세트에 녹음하는 것이 기술적으로 쉬웠습니다. 친구의 앨범을 빌려 카세트에 녹음해서 듣는 것. 이 행동이 1970년대부터 보편화됐습니다. 영국 레코딩 산업 협회(BPI)는 1979년 "홈 테이핑이 음악을 죽이고 있다(Home Taping Is Killing Music)"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해골과 교차된 뼈 형상의 카세트 테이프 아이콘으로 유명한 이 캠페인은 1980년대 초까지 이어졌습니다.

**소니(Sony)**가 1979년 출시한 워크맨(Walkman)은 카세트테이프 시장에 이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워크맨은 출시 후 첫 해에 약 150만 대가 판매됐습니다. 워크맨의 보급이 카세트테이프 수요 전체를 끌어올렸고, 이는 정품 카세트 음반 판매 증가와 동시에 개인 복사도 증가시켰습니다. 무료 복사 수단의 확산이 오히려 전체 시장을 키웠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죽이고 있었을까요. 통계는 복잡합니다. 음반 판매량이 줄어든 것은 맞지만, 카세트테이프 판매량과 카세트 음반 판매량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불법 복사가 음반 구매를 완전히 대체하지 않았습니다. 일부는 카세트로 미리 들어본 후 마음에 들면 정품 LP를 샀습니다.

이 현상은 이후 MP3와 스트리밍 시대에도 반복됩니다. 무료로 듣는 것이 반드시 유료 판매를 없애는 것은 아니라는 패턴. 하지만 음반사들은 이 패턴을 학습하지 못했고, 1990년대 디지털 전환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했습니다.

라디오 - 무료 방송이 음반 판매를 늘린 역설

1920년대, 라디오가 등장했습니다. 미국에서 1920년 최초의 상업 라디오 방송국 KDKA가 개국했습니다. 이후 NBC(1926년), **CBS(1927년)**가 설립됐습니다.

음반사들은 라디오를 두려워했습니다. 논리는 단순해 보였습니다. 라디오에서 무료로 음악을 들을 수 있다면 음반을 살 이유가 없어지는 것 아닌가.

초기 음반사들의 대응은 강경했습니다. **RCA 빅터(RCA Victor)**를 비롯한 주요 음반사들은 1920년대 라디오 방송국에 자사 음반 제공을 거부하거나 제한하는 방식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러나 방송 이후 실제 음반 판매가 늘어난다는 사례가 누적되면서 이 입장은 달라졌습니다. 1930년대 중반부터 라디오와 음반의 협력 구조가 정착됐습니다.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라디오는 음반 판매를 늘렸습니다. 라디오에서 곡을 듣고 마음에 든 청취자가 그 음반을 사러 갔습니다. 라디오가 사실상 음반 홍보 채널이 됐습니다. 음반사들은 DJ에게 자신의 음반을 방송해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돈을 주면서까지 방송을 원했습니다. 이것이 "페이올라(Payola)", 즉 방송 대가 비용의 기원입니다.

**BBC 라디오 1(1967년 개국)**은 이 효과를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비틀즈, 롤링 스톤즈의 음악을 대규모로 방송하면서, 해당 앨범의 판매량이 방송 직후 수십 배 증가하는 사례가 반복됐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음반 판매의 가장 강력한 동인이 된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1927년 경성방송국(현 KBS 제1라디오의 전신)이 개국했습니다. 1960년대 DJ 프로그램이 본격화되면서 라디오가 음반 판매를 견인했습니다. 남진, 나훈아의 대중가요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에 퍼진 사례가 대표적입니다. 방송 출연이 음반 판매와 직결되는 한국적 구조가 이 시기에 형성됐습니다.

당시 라디오는 음반 산업에게 다음 딜레마를 처음 제시했습니다. 무료로 배포하는 것이 판매를 늘리는가, 줄이는가. 라디오는 늘렸습니다. 이후 스트리밍 시대에 이 질문이 다시 등장했고, 음반사들은 다시 같은 답을 찾는 데 10년이 걸렸습니다.

**RCA(Radio Corporation of America)**의 성장이 이 역설을 잘 보여줍니다. RCA는 라디오 방송과 음반(RCA 빅터)을 동시에 운영했습니다. 라디오 방송에서 음악을 틀고, 그 방송이 음반 판매를 늘리고, 음반 판매 수익이 RCA 빅터로 돌아오는 구조. 무료 배포(라디오)와 유료 판매(음반)가 시너지를 만든 첫 번째 모델이었습니다.

스타 시스템과 레코드 레이블 - 아티스트가 받는 몫

음반 산업이 성장하면서 레코드 레이블의 역할이 확대됐습니다. 레이블은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음반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모든 과정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음반 수익의 대부분을 가져갔습니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의 사례가 이 구조를 잘 보여줍니다. 엘비스는 1954년 멤피스의 **선 레코드(Sun Records, 1952년 설립)**에서 처음 녹음했습니다. 선 레코드의 오너 샘 필립스는 1955년 엘비스의 계약을 RCA 빅터에 3만 5,000달러($35,000)에 양도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금액이었지만, RCA 빅터는 이후 엘비스를 통해 1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습니다. 아티스트의 가치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계약권을 확보한 레이블이 장기적으로 수익을 독점한 구조였습니다.

아티스트가 받는 로열티는 음반 판매 수익의 5~15% 수준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레이블, 유통사, 제작비 명목으로 빠져나갔습니다. 아티스트는 음반을 많이 팔아도 부유해지기 어려웠습니다. 공연 수익이 실질적인 생계였고, 음반은 공연의 마케팅 도구에 가까웠습니다.

이 구조가 나중에 "360도 계약"으로 진화합니다. 음반 수익뿐 아니라 공연, 굿즈, 광고 계약 등 아티스트의 모든 수익에서 레이블이 몫을 가져가는 방식. 그 변화는 20편에서 다룹니다.

**비틀즈(The Beatles)**와 EMI 산하 **팔로폰 레코드(Parlophone Records)**의 계약이 또 다른 전형입니다. 1962년 계약 당시 비틀즈의 로열티율은 약 1페니(penny)였습니다. 음반 1장을 팔 때 멤버 4명이 합쳐서 1페니를 받았습니다. 당시 싱글 가격이 6실링(72페니)이었으니, 비틀즈가 받는 몫은 1.4% 수준이었습니다. 1964년 미국 빌보드 1위 이후 재협상으로 조건이 일부 개선됐지만, 전체 커리어를 통해 EMI가 가져간 비율이 비틀즈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구레코드가 1970년대 이미자, 남진 등 주요 아티스트와 전속 계약을 독점했습니다. 당시 아티스트 로열티율은 2~5% 수준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글로벌 기준과 비교해도 낮은 편이었습니다.

레이블의 힘은 유통 인프라에 있었습니다. 전국 레코드 가게에 음반을 공급하고, 라디오 방송국에 홍보하고,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회사는 대형 레이블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티스트는 불리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레이블이 "마찰을 관리하는 자"였고, 그 대가로 수익 대부분을 가져간 것입니다.

한국 음악산업의 초기 형성 - 지구레코드와 오아시스레코드

한국 음반 산업이 형성된 것은 1950~60년대입니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군 문화와 함께 서양 음악이 들어왔고, 한국의 대중음악 산업이 발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구레코드(地球레코드, 1948년 설립)**와 **오아시스레코드(1963년 설립)**는 1960~70년대 한국 음반 시장의 핵심 유통사였습니다. 글로벌 음반 시장에서 RCA나 컬럼비아가 했던 역할을 한국에서 한 회사들입니다. 해외 팝을 라이선스해서 국내에 유통하고, 국내 아티스트와 계약해 음반을 제작했습니다.

**이미자(1941~)**의 1964년 음반 '동백 아가씨'는 당시 한국 음반 시장을 대표하는 히트작이었습니다. 레코드판으로 판매됐고, 이후 카세트테이프로도 출시됐습니다. **남진(1946~)**의 '님과 함께' 역시 1960~70년대 한국 음반 시장의 주요 상품이었습니다.

한국 음반 시장의 초기 구조는 글로벌과 유사했지만 규모가 훨씬 작았습니다. 아티스트와 레이블의 관계, 라디오 방송과의 연계, 음반 유통 구조 모두 글로벌 모델을 15~20년 뒤처져 따라갔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에서 한국은 달랐습니다.

한국의 방송 환경이었습니다. KBS와 MBC가 지상파 방송을 독점하는 환경에서, 음반 판매와 방송 노출의 연계가 매우 강했습니다. 음반 홍보의 핵심이 방송 출연이었고, 방송 출연 기회는 제한됐습니다. 이 환경이 이후 기획사 중심의 K-pop 시스템을 만드는 토대가 됐습니다. 방송 접근성을 가진 대형 기획사만이 신인을 스타로 만들 수 있었고, 이 독점이 SM엔터테인먼트,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라는 3대 기획사 체제로 굳어졌습니다.

대형 음반사의 집중화 - 유통이 곧 권력이다

20세기 중반, 음반 산업은 급격한 집중화를 겪었습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수십 개의 중소 레이블이 경쟁했습니다. 1990년대에는 "빅 6(Big Six)"으로 줄었고, 2000년대에는 "빅 3(Big Three)"가 됐습니다.

**유니버설 뮤직(Universal Music)**은 캐나다 음반사 MCA를 거쳐 1998년 네덜란드 **폴리그램(Polygram)**을 인수하며 세계 최대 음반사가 됐습니다. **소니 뮤직(Sony Music)**은 1988년 CBS 레코드를 20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글로벌 음반 시장에 본격 진입했습니다. **워너 뮤직(Warner Music)**은 애틀랜틱, 일렉트라, 워너 브라더스 레코드를 통합했습니다.

이 집중화의 이유는 단순합니다. 유통 인프라입니다. 전 세계 수십만 개의 레코드 가게에 음반을 공급하는 인프라를 구축하려면 막대한 자본이 필요했습니다. 소형 레이블은 유통을 대형 레이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의존하는 순간 수익의 대부분을 넘겨야 했습니다.

"마찰을 관리하는 자가 수익을 가져간다"는 원칙이 여기서도 작동했습니다. 유통 마찰(물리적 음반을 전국에 배송하는 것)을 해결한 회사들이 음반 산업을 지배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인터넷이 그 마찰을 없앴습니다. 물리적 유통 인프라가 BM의 기반이던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 충격이 16편의 주제입니다.

이 편의 힌트 - 뉴콘텐츠 기획자를 위한 체크포인트

체크포인트 1: 당신의 콘텐츠는 소유 가능한가, 아닌가?

소리는 원래 소유할 수 없었습니다. 축음기가 소리를 소유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전환이 음악 BM 전체를 바꿨습니다. 당신의 콘텐츠가 디지털 형태라면, 그것은 소유 가능한가요, 아니면 경험으로만 존재하는가요? 소유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BM을 만드는 첫 번째 선택입니다.

체크포인트 2: 무료 배포가 판매를 늘리는가, 줄이는가?

라디오는 무료 배포가 음반 판매를 늘린다는 것을 처음 증명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조건에서 무료 배포가 유료 전환을 만드는지를 판단하는 것이 이 시대에도 가장 중요한 BM 설계 질문입니다. 당신의 콘텐츠는 어느 쪽인가요?

체크포인트 3: 유통을 누가 관리하는가?

에디슨이 기술에서 졌습니다. 대형 음반사들은 아티스트에게 불리한 조건을 강요했습니다. 그 근거는 항상 유통 인프라였습니다. "우리가 없으면 팔 방법이 없다." 지금 당신의 콘텐츠를 유통하는 플랫폼은 어떤 수수료를 요구하고 있는가? 그 수수료의 근거는 어떤 마찰을 해결해주기 때문인가?

다음 편에서는 이 견고한 음반 산업이 디지털의 충격을 받는 순간을 봅니다. CD가 만든 황금기, 그리고 MP3와 냅스터가 가져온 균열. 음악산업이 먼저 겪은 것을 게임산업이 10년 뒤에 겪었습니다.

김동은WhtDrgon@MEJE.kr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