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DONG-EUN · FTUE 최초 사용자 경험
26 경험의확장을유저에게
26장. 경험의 확장을 유저에게 맡길 수 있는가
여기서부터 6부다. 어떤 숫자를 보고 무엇을 고쳐 다시 잴지는 25장이 끝냈고, 사람마다 다른 첫 경험을 기계가 알아서 지어 주는 이야기는 27장에서 기다린다. 이 장은 그 사이에서 묻는다. 첫 경험을 짜는 일의 일부를 사용자 자신에게 넘길 수 있는가, 그가 고른 것으로 그의 취향을 읽어도 되는가.
처음 온 사람에게 깊은 자유도는 놀이터가 아니라 시험지다.
첫 화면을 열자 선택지 스무 개가 한꺼번에 깔린다. 능력치를 나누고 외형을 고르고 진행 경로를 정하라는 요구 앞에서, 처음 온 사람은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몰라 그대로 굳는다. 우리가 자유라며 펼쳐 놓은 화면이, 그에게는 풀어야 할 문제지로 보인다.
지금까지 첫 경험은 우리가 짠다고 전제해 왔다. 첫 화면도, 첫 보상도, 첫 선택지도 설계자가 깔았고, 사용자는 우리가 만든 길 위를 걸었을 뿐이다. 그런데 길을 다 깔아 주는 쪽보다 길을 함께 내게 하는 쪽이 사람을 더 깊이 붙드는 경우가 많다. 자기 손으로 캐릭터를 꾸미고, 자기 취향으로 화면을 바꾸고, 자기가 고른 것으로 다음에 볼 것이 정해지게 두면, 그 순간 사용자는 구경하던 사람에서 짓는 사람으로 바뀐다.
이를 끝까지 밀어붙인 데가 로블록스다. 회사가 게임을 다 만들어 내려보내는 대신, 사용자가 직접 만든 놀거리와 아이템으로 세계가 채워진다. 입은 옷이나 꾸민 캐릭터 상당수도 회사가 아니라 사용자가 만든 것이라고 알려져 있고, 그렇게 만든 것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 돈을 버는 사람도 적지 않다. 구경하러 들어온 사람이 어느새 짓는 사람이 되고, 짓는 사람이 다시 다른 사람의 놀거리가 되는 구조다. 여기서 욕심이 생긴다. 경험의 확장조차 사용자에게 맡길 수 있지 않을까. 그가 고르고 꾸미고 짓게 두면, 우리가 일일이 설계하지 않아도 경험이 사람마다 알아서 풍성해지지 않을까.
이 욕심은 절반만 맞다. 사용자에게 주도권을 넘기면 그가 더 깊이 발을 들이는 건 사실이지만, 동시에 주도권은 짐이기도 해서 고를 자유를 주는 일은 고를 부담을 함께 주는 일이다. 첫 화면에서 너무 많은 것을 맡기면, 사용자는 풍요로움이 아니라 막막함을 먼저 만난다. 이 장은 그 경계를 본다. 무엇을 사용자에게 넘기고 무엇을 우리가 쥐고 있어야 하는지, 그가 고른 것을 어디까지 그의 취향으로 읽어도 되는지를 가른다.
고르게 하는 순간, 사용자는 자기를 드러낸다
5부 내내 따라온 그 가상 게임으로 다시 가 보자. 캐릭터를 모으고 대화하는 그 모바일 게임인데, 이번에는 첫 화면에서 사용자에게 캐릭터를 직접 꾸미게 한다. 색을 고르고, 무늬를 얹고, 표정을 정하고, 이름을 붙인다. 표면적으로 이건 그냥 꾸미기 놀이지만, 그가 무엇을 고르는지를 옆에서 보면 우리는 그에 대해 꽤 많은 것을 알게 된다. 파스텔 톤을 고르고 둥근 무늬를 얹고 웃는 표정을 택한 사람과, 어두운 색에 날카로운 선을 더하고 무표정을 택한 사람은 같은 게임을 다르게 즐길 사람이다. 한쪽은 따뜻하고 안온한 경험을 기대하고, 다른 쪽은 멋지고 날 선 경험을 기대한다. 그가 입으로 "나는 이런 걸 좋아해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그가 고른 것이 대신 말해 준다.
여기서 선택은 취향의 신호가 된다. 사용자는 자기 취향을 또렷이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어떤 게임을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대답이 막연하거나 막상 해 보면 말과 다르게 행동한다. 말은 자기가 되고 싶은 모습을 비추고, 선택은 자기가 실제로 끌리는 것을 비춘다. 그래서 무엇을 좋아하느냐고 묻는 대신 무엇을 고르는지를 보면 더 정직한 신호가 잡힌다. 첫 화면의 꾸미기는 사용자를 즐겁게 하는 동시에, 그가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는 창이다.
이 신호가 특히 값진 건 처음 들어온 사람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막 들어온 사용자는 백지에 가까워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경험을 기대하는지 어디서 살다 왔는지 우리는 모른다. 모르는 채로 추천을 하면 빗나가고, 빗나간 추천은 첫인상을 망친다. 처음 보는 사람을 어림짐작해야 하는 이 곤란을, 그가 고른 것 몇 가지가 풀어 준다. 색 하나, 무늬 하나, 이름 하나가 백지에 첫 줄을 그으면, 그 첫 줄 위에서 다음 화면을 그의 결에 맞게 지을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에서 한 줄이라도 알게 된 상태로 넘어가는 일, 그 출발이 첫 선택이다.
MEJE 아이동월드에서는 이 신호가 더 순수하게 드러난다. 팬이 아이동을 꾸밀 때, 그가 고르는 색과 모양에는 자기 취향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분홍을 고르고 리본을 얹는 팬, 파랑을 고르고 점박이를 택하는 팬은 저마다 다른 결에 끌린 것이다. 남의 시선이나 유행을 의식하기 전, 그 첫 선택은 팬 자신의 취향에 가장 가깝다. 첫 꾸미기는 팬을 즐겁게 하면서, 그가 어떤 결의 아이동에 끌릴지를 가장 먼저 비춰 주는 거울이다.
여기서 정면으로 봐 둘 긴장이 하나 있다. 첫 꾸미기 화면은 사용자에게는 놀이지만 우리에게는 설문이라서, 즐거움을 주는 화면과 신호를 채집하는 화면이 같은 화면이다. 사용자가 그 사실을 알면 선택이 달라질까. 알려야 할까. 숨기면 그의 놀이를 우리가 몰래 읽은 셈이 되고, 그렇다고 묻는 화면처럼 만들면 놀이가 도로 시험지가 된다. 이 책의 답은 숨기지도 캐묻지도 않는 쪽이다. 채집한 신호가 무엇에 쓰이는지를 그가 알 수 있게 두고, 틀렸을 때 고칠 수 있게 한다. 이 투명함의 울타리는 27장에서 마저 세운다.
그가 고른 것을 어디까지 그의 취향으로 읽어도 되나
선택이 취향의 신호라는 말은 솔깃하지만, 그대로 믿으면 위험하다. 사용자가 고른 것이 늘 그의 취향인 건 아니다. 몇 가지 함정이 선택과 취향 사이에 끼어든다.
첫째, 사용자는 주어진 것 중에서만 고른다. 우리가 색 다섯 개를 늘어놓으면 그는 그 다섯 중 하나를 고르는데, 그가 진짜 원한 색이 그 다섯에 없었다면 그의 선택은 취향이 아니라 차선책이다. 보기를 우리가 짠 이상, 그 선택은 우리 손이 닿은 선택이다. 둘째, 사용자는 맥락에 휘둘린다. 맨 위에 놓인 것, 가장 크게 보이는 것, 남들이 많이 골랐다고 적힌 것에 손이 먼저 가는데, 그게 그의 취향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배치되어서다. 셋째, 첫 선택은 아직 취향이 아니라 탐색일 수 있다. 처음 들어온 사람은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모른 채로 일단 눌러 보는데, 그 첫 누름을 굳은 취향으로 새겨 두면 우리는 그를 잘못 박제한다. 한 번 분홍을 골랐다고 그 사람을 영영 분홍 좋아하는 사람으로 가두면, 그가 다음에 파랑에 끌릴 자유를 우리가 막은 셈이다.
그래서 선택을 취향으로 읽되, 단정하지 않고 가설로 읽는다. 그가 분홍을 골랐다는 건 "이 사람은 분홍을 좋아한다"는 확정이 아니라 "이 사람은 따뜻한 결에 끌릴지도 모른다"는 첫 가설이다. 가설이니 다음 선택으로 검증하고, 어긋나면 고친다. 선택 한 번으로 사람을 규정하는 대신 선택이 쌓이는 결을 보는데, 한 번은 우연이고 세 번 같은 방향이면 신호다. 그리고 그가 결을 바꾸려 할 때 언제든 바꿀 수 있게 문을 열어 둔다. 취향은 고정된 라벨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이니, 우리의 읽기도 같이 움직여야 한다.
읽은 신호는 다음 화면을 실제로 바꾸는 데까지 가야 일이 된다. 어두운 색에 날카로운 선을 고른 사람에게는 다음 화면의 추천 캐릭터 정렬을 멋지고 날 선 결이 앞에 오게 바꾸고, 첫 대사의 톤도 살갑게 들러붙는 말 대신 담백한 말로 고른다. 분홍과 리본을 고른 팬에게는 따뜻한 결의 캐릭터를 먼저 보여 주고 인사도 한 뼘 더 다정하게 건넨다. 신호를 읽고도 다음 화면이 모두에게 같다면, 그 신호는 읽은 게 아니라 쌓아 둔 것이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자유롭다는, 흔한 믿음
경험의 확장을 사용자에게 맡기는 장이니, 게임을 만드는 쪽의 관습 하나를 검문소에 세운다. "자유도가 높을수록 좋은 게임이다, 빌드와 커스터마이즈가 깊을수록 좋다"는 믿음이다. 화면 위의 관습이라기보다, 무엇을 좋은 게임으로 치느냐에 대한 오래된 상식이다.
이 믿음이 무엇을 당연하다고 전제하는지부터 본다. 사용자에게 줄 수 있는 선택이 많을수록 그가 더 자유롭고, 자유로울수록 더 만족한다고 본다. 그래서 능력치를 잘게 쪼개고, 장비 조합을 늘리고, 외형 옵션을 수백 가지로 펼치고, 직업과 진행 경로를 여러 갈래로 연다. 이 전제는 깊이 파고드는 게임의 문법에서 자랐다. 한 캐릭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키우고, 남과 다른 조합을 찾아내고, 수많은 갈래에서 자기 길을 고르는 일이 그 자체로 게임의 깊은 재미이기 때문이다. 빌드를 짜고 커스터마이즈를 파고드는 사람에게 선택지의 풍부함은 곧 놀이터의 넓이다. 이 약속 안에서 더 많은 선택지는 더 많은 자유고, 더 많은 자유는 더 좋은 게임이다.
처음 온 사람은 이 약속을 공유하지 않는다. 평생 숏폼을 넘기며 다음 영상을 알아서 받아 온 사람에게, 첫 화면에 펼쳐진 수십 가지 옵션은 자유가 아니라 숙제다. 그는 고를 준비가 안 된 채로 고르기를 강요받는다. 드라마를 보던 사람은 이야기가 알아서 흘러가기를 기대하는데, 첫 화면이 "당신의 진행 경로를 고르세요, 능력치를 분배하세요"라고 요구하면 그는 보러 온 자리에서 갑자기 운영을 떠안는다. 커머스에서 비슷한 상품 수십 개를 비교하다 지쳐 본 사람은, 고를 게 많을수록 결정이 느려지고 결국 아무것도 안 고르고 닫게 된다는 걸 몸으로 안다. 게이머는 풍부한 선택지를 '내 놀이터'로 읽지만, 처음 온 사람은 그것을 '풀어야 할 시험지'로 읽는다. 같은 옵션 화면이 한쪽에는 자유고 한쪽에는 부담이다.
선택지가 많아지면 결정이 느려진다는 건 오래전부터 관찰돼 온 일이다. 보기가 둘이면 금방 고르지만, 스무 개면 비교하느라 더 걸린다. 다만 "많을수록 무조건 마비된다"고 단정하면 지나치다. 보기를 몇 묶음으로 정리해 두거나 사용자가 그 분야에 익숙하면 그 부담은 꽤 줄어든다. 그러니 정확히 말하면, 많은 선택지가 늘 사람을 마비시키는 게 아니라 정리되지 않은 선택지가 아직 이 세계에 서툰 사람에게 무겁다는 쪽이다. 처음 온 사람은 바로 그 서툰 사람이다. 풍부함이 정리되지 않은 채 첫 화면에서 한꺼번에 날아오면, 그는 경험이 시작되기도 전에 결정의 무게에 눌려 떠나기 쉽다. 그래서 적어도 첫 화면에서 선택지는 자유이기 전에 비용이다. 고를 것 하나하나가 사용자에게 집중력을 청구하고, 그 청구서가 한꺼번에 날아오면 그는 지갑을 닫듯 앱을 닫는다.
이 관습이 처음 온 사람에게 물리는 요금은 선택의 부담과 자기 의심이다.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모르는 채로 골라야 하는 상황은 집중력을 깎고, "내가 잘못 고르면 어떡하지"라는 자기 의심을 더한다. 게이머에게는 즐거운 고민이 처음 온 사람에게는 막막한 부담이다. 깊은 커스터마이즈를 첫 화면에 펼치는 일은, 아직 이 세계를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에게 운영의 권한을 통째로 떠넘기는 일과 같다.
본질만 남기고 바꾼다. 사용자가 자기 손으로 무언가를 정하는 즐거움, 그 정한 것이 자기를 비추는 만족은 남긴다. 다만 그 선택을 첫 화면에서 한꺼번에 쏟지 않는다. 처음에는 작고 또렷한 선택 하나만 준다. 색 다섯 개 중 하나, 캐릭터 셋 중 하나처럼, 고민 없이 손이 가고 무엇을 고르든 즐거운 선택. 그 한 번의 선택이 그를 짓는 사람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첫 신호를 준다. 깊은 커스터마이즈와 넓은 자유도는 지우는 게 아니라 뒤로 미룬다. 사용자가 이 세계를 충분히 좋아하게 되어 스스로 더 깊이 들어가고 싶어질 때, 그때 빌드와 조합과 수백 가지 옵션까지 풀어 준다. 그 무렵의 사용자는 선택지를 부담이 아니라 놀이터로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우리가 길을 깔되 한 갈래만 고르게 하고, 사용자가 걷는 법을 익힌 뒤에 갈래를 늘린다. 자유는 한꺼번에 주는 선물이 아니라,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게 된 만큼씩 넓혀 주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울타리를 더 친다. 사용자가 고른 것으로 다음 경험을 짤 때, 그 짜임이 사용자를 가두는 감옥이 되지 않게 한다. 그가 한번 따뜻한 색을 골랐다고 따뜻한 것만 계속 보여 주면, 그는 자기가 모르던 결을 만날 기회를 잃는다. 선택으로 추론하되, 추론한 것 밖으로 나갈 길을 늘 열어 둔다. 그리고 그 추론이 어디서 왔는지를 사용자가 알 수 있게 하고, 틀렸을 때 고칠 수 있게 한다. 이 울타리는 다음 장에서 더 깊이 다룬다.
▶ 내 화면에 대입하는 세 가지
- 자유도를 첫 화면에 다 펼쳐 놓지 않았나.
- 선택지마다 드는 망설임 비용을 셈했나.
- 첫 재미를 본 뒤에 자유를 주고 있나. 세 줄 중 하나라도 막히면, 첫 화면은 사용자에게 자유가 아니라 시험지를 내민다.
창작의 FTUE, 짓는 사람에게도 첫 30초가 있다
도입에서 세운 욕심, 로블록스처럼 경험의 확장을 통째로 사용자에게 맡기는 일로 돌아가자. 고르고 꾸미는 일까지는 자기를 위한 선택이지만, 남이 놀 것을 처음 만들어 보는 일은 한 층 위의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이 책의 도구는 그대로 다시 쓰인다. 처음으로 편집기를 연 사람도 처음 게임을 켠 사람과 똑같이 첫 30초 안에 자기가 여기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하고, 텅 빈 캔버스는 첫 화면에 깔린 스무 개의 선택지보다 무거운 시험지라 경험의 요금이 그대로 청구되며, 6장의 여덟 층으로 보면 그는 캐릭터를 움직이던 층에서 콘솔을 조작하는 층으로 올라서는 중이다. 그러니 창작의 첫 경험에도 FTUE를 깐다. 백지 대신 절반쯤 만들어진 견본에서 시작하게 하고, 첫 30초 안에 자기가 만든 것이 움직이는 걸 보게 하고, 저장과 되돌리기를 먼저 보여 줘 망칠 두려움을 덜어 준다.
그리고 창작이 남의 경험이 되는 순간, 품질의 울타리가 필요해진다. 슈퍼 마리오 메이커는 스테이지를 올리려면 만든 사람이 시작부터 끝까지 직접 깨는 클리어 체크를 통과하게 했는데, 깰 수 없는 스테이지가 남의 첫 경험을 망치지 못하게 막는 울타리인 셈이다. 사용자가 지은 것이 다른 사용자의 첫 화면이 되는 구조라면, 그 사이의 울타리 하나는 설계자가 끝까지 쥐고 있어야 한다. 경험의 확장은 맡길 수 있어도, 남의 최초를 지키는 일까지 맡길 수는 없다.
그래서, 작은 선택 하나부터 맡기고 결을 읽는다
경험의 확장을 사용자에게 맡길 수 있느냐는 물음의 답은 "맡길 수 있되, 한꺼번에는 아니다"이다. 첫 화면에서는 작고 즐거운 선택 하나만 맡기는데, 그 선택은 사용자를 짓는 사람으로 만드는 동시에 백지였던 그에 대한 첫 신호가 된다. 그 신호를 취향의 확정이 아니라 가설로 읽고, 다음 선택으로 검증하며 결을 그려 간다. 깊은 자유도와 커스터마이즈는 지우지 않되 사용자가 이 세계를 좋아하게 된 뒤로 미루고, 선택지는 자유이기 전에 비용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 그래서 무엇을 맡길지를 정하는 일은, 사용자가 지금 감당할 수 있는 결정의 무게가 어디까지인지를 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가 고르는 사람을 지나 짓는 사람으로 올라설 때는 창작의 첫 30초를 따로 깔고, 그가 지은 것과 남의 최초 사이에는 품질의 울타리를 세운다.
이 결정은 측정으로 이어진다. 사용자에게 맡긴 선택이 즐거움이었는지 부담이었는지는 그 선택 화면에서 사람이 머무는지 떠나는지로 드러난다. 선택을 마친 비율이 높고 그 뒤로 잘 나아가면 우리가 맡긴 무게가 알맞았다는 신호이고, 선택 화면에서 오래 머뭇거리다 떠나는 사람이 많으면 너무 많이 맡겼다는 신호다. 그리고 사용자가 고른 것으로 다음을 짰을 때 그 다음 경험에 더 잘 머무는지를 본다. 그가 고른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읽었다면 머무는 비율이 오르고, 빗나가게 읽었다면 오히려 떨어진다. 그러니 추론마다 확인 이벤트를 하나씩 단다. 분홍 가설에 따라 바꾼 다음 화면에서 그가 실제로 더 머물렀는가, 그 한 가지를 재는 이벤트를 심어 25장의 측정 루프에 태우면 개인화라는 추론 자체가 검증의 대상이 된다. 정량은 우리가 사용자에게 자유를 준 것인지 짐을 지운 것인지를, 그리고 그의 신호를 맞게 읽었는지를 비춰 준다.
참고 콘텐츠
이 장의 개념이 드러나는 다른 매체·분야의 사례.
UGC 플랫폼 / 게임
- 로블록스 : 회사가 다 만들어 내려보내는 대신 사용자가 만든 놀거리와 아이템으로 세계가 채워진다. 구경꾼이 짓는 사람으로 바뀐다.
- 슈퍼 마리오 메이커 : 스테이지를 올리려면 만든 사람이 시작부터 끝까지 직접 깨는 '클리어 체크'를 통과해야 한다. 깰 수 있는 것만 남의 놀거리로 풀린다.
게임
- 울티마 4 집시의 질문 : 직업을 직접 고르게 하는 대신, 두 덕목 중 하나를 택하는 도덕적 딜레마 일곱 개를 던져 그 선택으로 어울리는 직업을 정한다. 무엇을 좋아하느냐 묻지 않고 무엇을 고르는지로 사람을 읽는다.
- 패스 오브 엑사일 패시브 스킬 트리 : 수백 갈래로 뻗은 거대한 트리가 빌드를 파는 사람에겐 놀이터지만, 처음 온 사람에겐 자주 막막함과 선택 마비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같은 깊은 자유도가 한쪽엔 자유, 한쪽엔 시험지다.
현실 / 행동경제
- 잼 진열대 실험 : 잼 24종을 깔았을 때보다 6종만 깔았을 때 사람들이 훨씬 더 많이 사 갔다고 알려져 있다. 많은 보기는 멈춰 세우고, 추려진 보기는 결정을 돕는다.
나머지 참고 콘텐츠는 이 글 끝의 '26장 부록'에 모아 두었다(단행본에서는 부록 D로 묶인다).
설계 노트 ▶ 직접 해보기
우리 게임의 첫 경험에서, 사용자가 직접 고르거나 꾸미는 곳을 찾는다. 색을 고르는 곳, 캐릭터를 정하는 곳, 화면을 바꾸는 곳 같은 것들이다.
그 곳마다 묻는다. 지금 여기서 사용자가 한 번에 고를 것이 몇 개인가. 다섯을 넘는다면 첫 화면에 그만큼이 필요한지 다시 보고, 미룰 수 있는 선택은 사용자가 이 세계를 좋아하게 된 뒤로 미룬다. 그리고 그 곳에서 사용자가 고른 것이 우리에게 어떤 신호를 주는지를 "이 색을 고른 사람은 ( )한 결에 끌릴 수 있다"처럼 한 줄로 적는다.
마지막으로 한 줄을 더 단다. 사용자가 한 번 고른 것을 우리가 그의 취향으로 새긴 뒤, 그가 마음을 바꾸려 할 때 바꿀 수 있는 문이 어디에 있는가. 그 문이 없다면 어디에 낼지를 적는다. (선택을 취향으로 추론하는 설계, 그리고 선택·추천·자동화를 언제 어디에 쓸지 가르는 정밀한 판단표는 부록 C.)
다 적고 나면 한 줄로 판정한다. 첫 화면이 맡긴 선택이 사용자를 짓는 사람으로 만들면 통과시키고, 고를 무게에 눌러 주저앉히면 그만큼을 뒤로 미룬다.
한 줄 요약: 사용자가 고르는 것은 그가 입으로 못 하는 취향을 대신 말해 주는 신호이고, 처음 온 백지 같은 사람을 어림짐작하는 곤란을 풀어 주는 첫 줄이다. 다만 선택을 취향의 확정이 아니라 가설로 읽고, 쌓이는 결로 검증하며, 마음을 바꿀 문을 열어 둔다. "자유도와 커스터마이즈가 깊을수록 좋다"는 상식은 게이머에겐 놀이터지만 처음 온 사람에겐 시험지다. 선택지는 자유이기 전에 비용이니, 첫 화면에는 작고 즐거운 선택 하나만 맡기고 깊은 자유는 사용자가 감당할 수 있게 된 만큼씩 연다. 사용자가 남을 위해 짓는 사람이 될 때는 창작의 FTUE를 따로 깔고, 그가 지은 것이 남의 최초가 되는 길목에 품질의 울타리를 세운다. 다음 장: 여기까지가 사용자가 고른 것으로 그의 결을 읽고 다음 경험을 짓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읽고 짓는 일을 기계가 대신한다면 어떻게 될까. 사용자가 무엇을 고르는지를 보고, 사람마다 다른 첫 화면을 알아서 지어 주는 일은 이미 시작됐다. 그렇게 첫 경험이 사람마다 달라진다면, '최초'는 대체 누구의 최초인가. 그리고 그렇게 맞춰 준 경험은 정말 더 나은가. 마지막 장은 그 물음에서 시작한다.
26장 부록: 참고 콘텐츠 모음
본문의 참고 콘텐츠 절에는 이 장의 논증에 직결되는 핵심 몇 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여기에 매체별로 모았다. 사용자가 짓는 사람이 되는 UGC 플랫폼과 모드 커뮤니티, 창작 도구에서 시작해, 첫 선택으로 사람을 읽는 게임들, 행동경제의 실험, 앱과 커머스, 오프라인 계산대, 문학과 영상까지 이어진다. 이 장의 세 논점, 곧 사용자가 고른 것을 취향의 확정이 아니라 가설로 읽는 일, 선택지는 자유이기 전에 비용이라는 경계, 그리고 짓는 사람에게도 첫 30초가 있다는 창작의 FTUE와 품질의 울타리를 옆에 두고 읽으면, 항목마다 붙인 "살펴볼 점"이 어디에 닿는지 보인다.
UGC 플랫폼 / 게임·완구
- 리틀빅플래닛(2008) : "플레이·제작·공유"를 구호로 내세워 경험의 확장을 사용자 손에 넘긴 초기 사례로, 사용자가 만든 스테이지가 다른 사용자의 놀거리가 되는 구조를 콘솔에서 보여 줬다. 살펴볼 점: 구경하던 사람이 짓는 사람으로 바뀌는 일을 게임이 정체성 구호로까지 끌어올린 모습을 본다.
- 드림즈(Dreams, 2020) : 게임 자체를 사용자가 만들어 나누어, 짓는 사람이 곧 콘텐츠가 된다. 살펴볼 점: 창작 도구가 깊어질수록 처음 여는 사람의 시험지도 두꺼워지니, 창작의 FTUE가 어떻게 깔렸는지를 같이 본다.
- 레고 아이디어즈 : 팬이 설계한 세트가 지지자 1만 명을 모으면 회사의 심사를 거쳐 정식 제품으로 나오고, 채택된 설계자는 수익 일부를 받는다. 살펴볼 점: 창작을 맡기되 남의 손에 닿기 전에 품질의 울타리를 회사가 쥔다는 점에서, 마리오 메이커의 클리어 체크와 같은 갈래다.
모드 / 제작 커뮤니티
- 마인크래프트 모드와 커스텀 맵 : 사용자가 세계를 확장해, 설계자가 일일이 깔지 않은 경험이 사람마다 풍성해진다. 살펴볼 점: 확장을 맡긴 쪽이 얻는 대표적 이득이라, 설계자가 만들 수 있는 양의 한계를 커뮤니티가 어떻게 넘는지 본다.
- 스카이림·스팀 워크숍 모드 생태계 : 길을 다 깔아 주는 쪽보다 함께 내게 하는 쪽이 사람을 더 깊이 붙든다. 살펴볼 점: 출시 후 십 년 넘게 이어지는 수명이 어디서 오는지, 모드를 짓고 나누는 사람들의 동기를 본다.
창작 도구 / 교육
- 스크래치(Scratch)의 리믹스 문화 : MIT에서 만든 어린이용 코딩 도구로, 백지에서 시작하는 대신 남의 프로젝트를 열어 고치는 리믹스를 권하고 그 계보를 공개해 보여 준다. 살펴볼 점: 텅 빈 캔버스라는 가장 무거운 시험지를 절반쯤 만들어진 견본으로 덜어 주는, 창작의 FTUE 처방 그대로다.
크리에이터 플랫폼
- 유튜브·트위치 크리에이터 경제 : 보러 온 사람이 어느새 만드는 사람이 되고, 그 만든 것이 다시 다른 사람의 볼거리가 된다. 살펴볼 점: 보던 사람이 만드는 사람으로 올라서는 계단이 플랫폼의 사업 모델 자체가 된 모습이다.
비디오게임의 첫 선택
- 동물의 숲 캐릭터 만들기 : 게임을 켜자마자 가장 먼저 피부톤·머리·눈·코를 직접 고르게 해, 무엇을 고르는지가 말로 못 하는 취향을 대신 비춘다. 집에 둔 거울로 언제든 다시 바꿀 수 있어 첫 선택을 확정이 아니라 가설로 둔다. 살펴볼 점: 첫 선택을 가설로 두는 장치, 곧 마음을 바꿀 문이 게임 안에 어떻게 들어가 있는지 본다.
- Wii Mii 만들기 : 새 Mii를 만들 때 '닮은꼴 고르기'로 미리 만든 얼굴에서 시작할 수 있게 해, 백지에서 처음부터 짜는 부담을 덜고 그 위에서 고치게 한다. 살펴볼 점: 백지의 부담을 견본으로 더는 처방이 캐릭터 만들기에서는 어떤 모양이 되는지 본다.
- 매스 이펙트 패러건/레니게이드 : 대사 선택이 고결한 쪽과 거친 쪽으로 쌓이며 주인공의 성격을 만들고, 그 결이 곧 플레이어의 성향을 비춘다. 살펴볼 점: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같은 방향으로 쌓이는 결을 신호로 읽는다는, 본문의 "세 번 같은 방향이면 신호"와 같은 생각이다.
현실 / 행동경제
- 장기기증 옵트인/옵트아웃 기본값 : 기본을 '기증 안 함'으로 두느냐 '기증함'으로 두느냐만 바꿔도 등록률이 크게 갈린다고 알려져 있다. 살펴볼 점: 첫 선택의 상당 부분이 사실 설계자가 정한 기본값의 결과라는 것, 그래서 선택을 취향으로 읽을 때 기본값의 몫을 빼고 읽어야 한다는 것을 본다.
- 겉으로 말한 선호와 행동으로 드러난 선호 : 사람들은 설문에선 이상적인 답을 적지만, 실제 비용을 치를 땐 다르게 행동하는 일이 잦다. 살펴볼 점: 묻지 말고 고르는 걸 보라는 이 장의 원칙이 행동경제에서는 오래된 상식임을 확인한다.
- 필터 버블 : 한번 보인 결만 계속 비슷하게 추천하면 사용자는 모르던 결을 만날 기회를 잃는다는 우려가 자주 거론된다. 살펴볼 점: 선택으로 추론하되 추론 밖으로 나갈 길을 막지 않는다는 울타리가 왜 필요한지의 근거가 된다.
- 이케아 효과 : 자기 손으로 조립한 상자를 같은 완성품보다 더 높게 치는 경향이 실험으로 보고되었다(2012년 노턴 등의 연구). 살펴볼 점: 작은 수고를 맡기는 일이 애착을 만든다는 것, 다만 그 수고가 즐거움의 선을 넘으면 첫 화면의 시험지가 된다는 경계까지 본다.
- 케이크 믹스의 달걀 전설 : 물만 부으면 되는 믹스가 안 팔리다가 달걀 하나를 직접 넣게 하자 팔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마케팅 전설로 자주 회자된다. 다만 달걀을 넣게 한 결정은 그 심리 조언보다 훨씬 앞서 맛과 품질 때문이었다는 반박이 있어, 신화에 가깝다는 검증도 함께 전해진다. 살펴볼 점: 한 손길을 남기는 설계의 직관은 이케아 효과로 따로 지지되지만, 회자되는 일화 자체도 검증의 대상이라는 점을 같이 본다.
일반 앱 / 커머스
- 비슷한 상품 수십 개 비교의 피로 : 고를 게 많을수록 결정이 느려지고 결국 아무것도 안 고르고 닫게 된다. 살펴볼 점: 첫 화면 선택지는 자유이기 전에 비용이라는 명제를, 누구나 몸으로 아는 형태로 보여 준다.
오프라인 / 일상
- 샌드위치 가게의 연쇄 질문 주문 : 빵 종류, 길이, 치즈, 채소, 소스를 연달아 고르게 하는 주문대 앞에서 처음 온 손님이 굳는 모습은 흔히 관찰된다. 단골에게는 내 맘대로 짓는 즐거움이 되는 그 질문들이, 처음 온 사람에게는 정답 없는 시험이 된다. 살펴볼 점: 같은 선택지가 익숙한 사람에게는 자유, 서툰 사람에게는 비용이 된다는 이 장의 경계가 계산대 앞에서도 그대로 벌어진다.
앱 / 영상·음악
- 스포티파이 가입 직후 아티스트 고르기 : 백지 같은 신규 사용자에게 좋아하는 아티스트 몇을 고르게 해 그 선택을 추천의 첫 씨앗으로 쓴다. 듣는 행동이 쌓이면 점차 그 첫 씨앗을 실제 행동 신호로 갈아끼운다. 살펴볼 점: 첫 선택을 씨앗으로 쓰되 행동이 쌓이면 갈아끼운다는, 가설로 읽기의 표준 구현이다.
- 넷플릭스 가입 직후 '좋아하는 작품 고르기' : 새 프로필에 좋아하는 작품 몇을 고르게 해 취향 프로필의 씨앗을 잡되, 이후 실제로 보고 멈추고 다시 본 행동이 그 첫 선택을 덮어쓰게 한다. 살펴볼 점: 첫 선택을 덮어쓰게 둔다는 점에서, 한 번의 선택으로 사람을 잘못 새겨 두는 함정을 피한 견본이다.
- 틱톡 추천 피드 : 좋아하는 걸 묻는 설문 없이, 끝까지 본 영상·금방 넘긴 영상·머뭇거린 시간 같은 실제 행동만으로 취향을 읽어 다음을 고른다. 살펴볼 점: 말이 아니라 손이 한 것을 신호로 삼는 극단이라, 묻지 않고도 결이 읽힌다는 힘과 그 읽기가 사람을 가둘 수 있다는 위험을 같이 본다.
문학
- 게임북(예: '네 맘대로 골라라' 시리즈) : 2인칭 '너'로 쓰여 독자가 주인공이 되고, 갈림길마다 직접 골라 결말이 갈린다. 살펴볼 점: 읽기만 하던 사람이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 바뀌는, 가장 오래된 장치 가운데 하나다.
영화 / 드라마
-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2018) : 시청자가 10초 안에 골라 이야기를 갈래로 진행시키고, 안 고르면 기본 선택으로 흘러간다. 살펴볼 점: 보던 사람을 고르는 사람으로 바꾸되, 멈칫하는 사람에게는 기본값이 짐을 덜어 준다는 선택 무게의 조절 장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