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DONG-EUN · FTUE 최초 사용자 경험 (30편)
11장. 사용자의 상태: 산만함과 경험의 요금
11장. 사용자의 상태: 산만함과 경험의 요금
경험은 주는 것이 아니라 청구되는 것이다. 첫 화면은 가장 비싼 계산대다.
앞 장에서 우리는 그 사람을 맞을 캐릭터를 정했고, 강아지를 앞세울지 고양이를 앞세울지, 어떤 감각의 통역자를 첫 화면에 세울지까지 짰다. 그런데 한 가지를 빼먹었다. 그 캐릭터를 만날 사람은 어떤 상태로 오는가.
기획서 속 사용자는 늘 좋은 상태다. 조용한 방에 앉아, 두 손으로 기기를 들고,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며, 첫 화면의 연출 하나하나를 음미한다. 우리가 정성껏 짠 캐릭터 등장 씬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이 사용자는 실재하지 않는다. 진짜 사용자는 지하철 손잡이에 한 손을 걸고 다른 손으로 화면을 누른다. 옆 사람의 통화 소리가 들리고, 곧 내릴 역을 신경 쓰고, 방금 보던 숏폼의 잔상이 아직 머릿속에 있다. 우리가 공들인 등장 씬은 그에게 그저 '빨리 넘어가고 싶은 무언가'다. 그 첫 화면 앞에서 그는 시간과 인지와 자존심과 신뢰를 한꺼번에 청구받고, 그 청구서를 받아 든 채로 떠날지 머물지를 몇 초 안에 정한다.
캐릭터가 아무리 좋은 통역자여도, 그 통역을 받을 사람이 듣고 있지 않으면 통역은 허공에 흩어진다. 그래서 캐릭터 다음에 봐야 할 것이 사용자의 상태다. 그가 화면에서 무슨 경험을 원하는지는 12장에서 펼칠 목록이고, 여기서는 그가 어떤 상태로 도착해 그 상태에서 무슨 요금을 치르는지부터 본다.
같은 화면, 다른 자리에서 본다
가상의 캐릭터 게임으로 들어간다. 우리는 첫 화면을 이렇게 짰다고 하자. 부드러운 음악이 깔리고, 캐릭터 셋이 차례로 등장하며 각자 한마디씩 인사를 건네고, 짧은 세계관 내레이션이 흐른 뒤 사용자에게 캐릭터를 고르라고 한다. 회의실에서 이 화면을 보면 따뜻하고 친절하고 공들여서 흠잡을 데가 없다.
이제 같은 화면을 다른 자리에서 본다. 퇴근길 만원 지하철에서 한 사람이 친구가 보내준 링크를 무심코 눌러 우리 게임을 처음 여는데, 음악이 깔리지만 이어폰을 안 꽂아서 소리는 껐다. 캐릭터 셋이 차례로 등장하는 동안 그는 빨리 넘기고 싶어 화면을 두 번 톡톡 치고, 세계관 내레이션이 흐르는 3초 동안 옆 칸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오며, 캐릭터를 고르라는 화면에서는 누가 누군지 모른 채 아무거나 가운데 것을 누른다. 우리가 1초 단위로 설계한 감정의 흐름이, 그에게는 통째로 '로딩과 누름' 사이의 지연이었다.
같은 화면인데 회의실의 사용자와 지하철의 사용자는 전혀 다른 것을 겪었다. 회의실의 사용자는 우리가 준 경험을 받았지만 지하철의 사용자는 그 경험을 치를 여유가 없었으니, 차이는 화면이 아니라 상태에 있다. 사용자는 우리가 가정한 상태로 도착하지 않는다.
MEJE 아이동월드를 보면 상태의 문제가 더 또렷하다. 팬이 강아지 아이동을 꾸미는 화면을 우리는 팬이 차분히 집중해서 색을 고르고 이름을 짓는 장면으로 그리지만, 실제로는 출퇴근 지하철에서 한 손으로, 쉬는 시간의 짧은 짬에, 자기 전 침대에서, 팬은 이 산만한 틈에 아이동을 돌본다. 그래서 아이동월드의 첫 꾸미기는 한 화면에 색·모양·이름을 다 펼치지 않고, 산만한 팬도 한 번에 하나씩만 고르면 아이동이 완성되도록 한 화면에 한 가지 결정만 둔다.
이 장이 상태부터 길게 본 이유는 하나다. 곧 말할 요금이 상태에 따라 값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경험에는 요금이 있다
여기서 멈춰 세울 말이 '공짜'다. 우리는 첫 경험을 사용자에게 '주는' 것이라고, 좋은 경험을 선물하듯 건넨다고 여긴다. 그런데 사용자 쪽에서 보면 경험은 받는 게 아니라 치르는 것이어서, 무언가를 내야 경험이 시작된다. 그 무언가를 이 책은 경험의 요금이라고 부른다.
요금은 돈만이 아니다. 첫 화면에서 사용자가 치르는 요금은 일곱 가지쯤으로 나뉜다. 하나씩 짚는다.
첫째는 집중력 요금이다. 화면을 이해하고, 무엇을 누를지 고르고, 방금 본 걸 기억하는 일에는 인지의 힘이 든다. 사용자의 집중력은 한정된 지갑이라, 첫 화면이 한꺼번에 여러 가지를 묻고 보여주면 그 지갑이 금세 비고, 설명이 많고 한 화면에 정보가 빽빽할수록 이 요금이 비싸진다.
둘째는 시간 요금이다. 다운로드를 기다리고, 로딩을 보고, 튜토리얼을 따라가고,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데 드는 시간이라, 사용자는 첫 재미를 맛보기도 전에 시간을 먼저 낸다. 시작하기 전에 설명부터 길게 들이밀면, 그는 재미를 보기도 전에 시간만 내고 떠난다.
셋째는 기회비용이다. 우리 게임을 켜는 동안 그는 유튜브를, 숏폼을, 친구의 메시지를 포기한다. 그에게 주어진 2분이라는 짧은 틈에서 우리는 그 모든 것과 같은 줄에 서서 경쟁한다. 그래서 우리 첫 화면이 답답하면 그는 곧장 "다른 거나 보지" 하고 떠나는데, 포기한 것이 손에 잡힐 듯 가깝기 때문이다.
넷째는 남에게 보이는 부담, 곧 사회적 요금이다. 시작하자마자 순위표에 내 이름이 꼴찌로 박히거나, 첫 동작을 공유하라고 떠밀거나, 친구를 초대해야 다음으로 넘어가게 하면, 사용자는 구경만 하려던 마음을 접고 물러선다. 처음 온 사람은 잘하는 모습을 보이기 전까지 남 앞에 서기를 꺼리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실패 요금이다. 첫 시도에서 지거나 막히거나 실수하면 사용자는 자기가 바보가 된 기분을 치르는데, 그 기분이 너무 비싸면 다시 시도하기보다 창을 닫는 쪽이 싸게 먹힌다. 첫 실패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그가 한 번 더 해볼지를 가른다.
여섯째는 개인정보 요금이다. 계정을 만들고, 권한을 허용하고, 전화번호나 이메일을 내주는 일이다. 아직 이 게임이 좋은지도 모르는데 먼저 내 정보를 내놓으라고 하면, 사용자는 지갑을 열기도 전에 신분증부터 요구받는 기분이 된다.
일곱째는 과금 심리 요금이다. 돈을 쓸지 말지 판단하는 일 자체가 부담이다. 첫날부터 상품 패키지가 화면을 덮고 할인 타이머가 깜빡이면, 사용자는 게임을 즐기기 전에 '여기 돈독 오른 곳인가'를 먼저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의 부담이 곧 요금이다.
이 일곱 요금의 공통점은 전부 첫 화면에서 가장 비싸다는 것이다. 사용자가 아직 이 게임에서 아무 재미도 못 봤을 때, 그러니까 치를 이유가 가장 약할 때, 우리는 흔히 가장 많은 요금을 한꺼번에 청구한다. 가입하라, 권한을 달라, 튜토리얼을 봐라, 친구를 불러라, 상품을 봐라. 받은 것도 없는데 낼 것만 많은 곳에 사람은 머물지 않는다.
그리고 이 요금들은 정가가 아니다. 같은 화면이 회의실에서는 싸고 지하철에서는 비싸다. 두 손과 조용한 방을 가진 사람에게 한 푼이던 집중력 요금이 한 손과 통화 소음 속의 사람에게는 몇 곱으로 뛰고, 소리를 끈 사람에게 음성으로만 건넨 안내는 같은 정보를 눈으로 다시 찾게 만들어 시간 요금을 덧붙인다. 내릴 역을 세는 사람에게는 30초짜리 연출의 기회비용이 두 배가 되고, 사람 가득한 칸에서는 요란한 실패 연출 하나가 실패 요금에 사회적 요금까지 얹는다. 그러니 요금을 셈할 때는 화면만 보지 말고 그 화면을 보는 상태를 함께 봐야 하고, 앞에서 지하철의 사용자를 길게 그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상태에 맞춰 화면 자체를 달리 짜는 법은 16장에서 비집중 상태의 설계로 따로 다루기로 하고, 이 장에서는 값이 상태를 따라 움직인다는 사실만 단단히 챙긴다.
여기서 원칙 하나만 미리 짚는다. 한 번에 하나만 요구한다. 첫 화면이 사용자에게 새로 익힐 것을 들이밀 때 그 양을 아주 얇게 저며, 한 화면에서 새것 하나, 다음 화면에서 또 하나를 준다. 큰 값을 일시불 대신 할부로 나눠 받는 셈인데, 사용자의 집중력 지갑은 그렇게 나눈 요금만 감당하고, 한꺼번에 청구하면 지갑이 닫히기 때문이다.
스태미나와 가챠라는, 요금을 당연하게 만든 관습
요금을 다루는 장이니 게임의 관습 둘을 검문소에 세운다. 행동력을 제한하는 스태미나·하트와, 확률로 보상을 주는 가챠다.
먼저 스태미나다. 많은 모바일 게임에서 사용자는 무한정 플레이하지 못하고, 행동마다 스태미나나 하트가 닳아 다 닳으면 시간이 지나 회복되기를 기다리거나 돈을 내고 채워야 한다. 이 관습은 어디서 왔나. 사용자를 매일 들르게 만들고, 한 번에 너무 오래 붙들지 않게 하고, 기다림을 돈으로 건너뛰게 해 매출을 만드는 운영 설계에서 왔다. 게이머는 이 틀을 알아서, 스태미나가 차면 들어와 소진하고 나가는 리듬을 게임의 호흡으로 읽는다.
처음 온 사람 중 상당수는 이 약속을 공유하지 않는다. 한창 재미를 붙이려는데 "오늘 횟수를 다 썼습니다"라는 화면이 뜨면 게임이 자기를 쫓아내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막 생긴 순간에 차단당하면 그 마음은 다음 날까지 이어지기보다 그 자리에서 식는다. 게이머는 스태미나를 '내일 또 올 핑계'로 읽지만 일반인은 '왜 나를 막지?'로 읽으니, 같은 장치가 한쪽에는 리듬이고 한쪽에는 벽이다.
이 관습이 일반인에게 물리는 요금은 시간 요금과 과금 심리 요금이다. 더 하려면 기다리거나 돈을 내야 하는데, 둘 다 첫 경험에서는 너무 이르다. 아직 좋아하지도 않는 것을 두고 기다림이나 결제를 강요받기 때문이다.
이 마찰은 캐주얼한 게임에서 더 또렷이 드러난다. 「캔디 크러시 사가」의 하트가 그런데, 한 판을 실패할 때마다 하트가 닳고 다 떨어지면 하나가 다시 차기까지 한참을 기다리거나 돈을 내야 한다. 이 하트 제한은 한창 더 하고 싶은 순간에 손이 묶인다는 불만이 오래도록 따라다닌 장치다. 큰 인기를 누린 게임에서도 사정은 비슷해서, 「원신」의 행동력은 첫날의 벽이라기보다 수십 시간을 들인 뒤에야 체감되는 후반의 마찰인데도, 그 게임에 이미 정착한 사용자들 사이에서조차 갑갑하다는 말이 꾸준하다. 두 사례의 교훈은 한 방향을 가리킨다. 정을 붙인 사람에게도 미운 장치라면, 아직 정을 못 붙인 첫 사용자에게는 더 일찍 더 세게 미울 수밖에 없다. 본질만 남기고 바꾼다. 행동력 제한이 원래 노리던 건 '매일 돌아올 이유'이지만, 그 이유를 첫날부터 벽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 첫 경험에서는 사용자가 멈추고 싶을 때까지 막지 않고,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충분히 자란 한참 뒤에야 돌아올 핑계로서의 리듬을 천천히 들인다.
이번엔 확률 뽑기로 보상이나 캐릭터를 주는 가챠다. 이건 희소성으로 설렘을 만들고 낮은 확률을 뚫었을 때의 짜릿함으로 사람을 붙드는 오랜 설계에서 왔다. 게이머에게 뽑기의 두근거림은 그 자체로 놀이여서,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연출을 그는 즐긴다.
처음 온 사람은 다르다. 그리고 실무도 이걸 모르지 않아서, 요즘 게임 다수는 튜토리얼에서 무료 뽑기 열 번을 쥐여 주는 식으로 첫 가챠의 돈 문제를 아예 지워 둔다. 이 무료 첫 뽑기가 통하는 이유는 분명한데, 요금 없는 설렘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나올지 모르는 두근거림만 남기고 청구서는 치웠으니, 가챠의 본질에서 가장 싼 조각만 떼어 첫 손에 쥐여 준 셈이다. 그런데 검문이 거기서 끝나지는 않는다. 과금 요금을 지워도 확률 표기와 재화 체계라는 집중력 요금이 남는다. 어떤 재화로 몇 번을 돌리고 확률이 얼마이고 보장은 몇 번째에 오는지 같은 체계는 게이머에게 상식이지만 처음 온 사람에게는 통째로 새 언어이고, 웹툰을 보러 왔거나 캐릭터가 좋아서 들른 사람에게 그 언어는 자기가 기대한 경험과 결이 달라서, 게이머는 가챠를 설렘으로 읽지만 상당수는 '돈 쓰게 하려는 함정'으로 읽는다.
이 관습이 일반인에게 물리는 요금은 과금 심리 요금과 신뢰의 손상이다. 즐기기도 전에 '여기 돈 많이 들겠다'를 먼저 계산하게 만들고, 그 계산이 신뢰를 깎기 때문이다. 무료 열 번으로 입장료를 지운 게임이라도 그 직후에 확률과 재화의 언어를 한꺼번에 들이밀면 같은 계산이 시작된다. 본질만 남기고 바꾼다. 가챠가 원래 주려던 건 '무엇을 얻을지 모르는 설렘'인데, 그 설렘은 꼭 확률과 돈이 아니어도 만들 수 있다. 첫 경험에서는 사용자가 무엇을 얻을지 직접 고르게 하거나 노력의 결과로 확실히 돌려주는 쪽이 안전하고, 운과 돈으로 굴러가는 설렘은 사용자가 이 세계를 이미 신뢰한 뒤에야 그 체계의 언어와 함께 선택지로 내민다.
▶ 내 화면에 대입하는 세 가지
- 이 화면이 일반인에게 무슨 요금을 청구하나.
- 일반인이 그 요금을 낼 의향이 있나.
- 요금을 청구하기 전에 가치를 미리 보여줬나. 셋 중 하나라도 막히면, 그 화면은 받은 것 없는 사람에게 먼저 청구하고 있다.
그래서, 첫 5분의 요금부터 예산을 짠다
요금이라는 눈으로 첫 화면을 다시 보면 설계의 순서가 바뀌어, 무엇을 보여줄까를 먼저 묻는 대신 무엇을 청구할까와 무엇을 미룰까를 먼저 묻게 된다.
첫 경험의 요령은 한 줄로 이렇다. 받기 전에 청구하지 않는다. 사용자가 첫 재미를 손에 쥐기 전에는 비싼 요금을 미뤄서, 가입은 저장할 게 생긴 뒤로, 권한은 그 권한이 필요한 행동을 하려는 순간으로, 결제 제안은 가치를 이해한 뒤로, 순위 비교는 자신감이 붙은 뒤로 미룬다. 가입이란 사용자 쪽에서 보면 일종의 보증금이라, 맡길 만한 것이 생긴 뒤에야 기꺼이 낸다. 첫 화면은 가능한 한 '공짜로 보이는 것'이어야 한다. 사용자가 유튜브를 켤 때 비용을 의식하지 않듯, 우리 첫 화면도 요금이 안 보여야 그가 일단 발을 들이기 때문이다. 요금이 미리 보이면 그는 들어오기 전에 계산부터 하고, 계산하는 순간 다른 콘텐츠가 더 싸 보인다.
여기서 선 하나를 분명히 긋는다. 미루는 것과 숨기는 것은 다르다. 미루기는 가치를 먼저 준 뒤에 청구하는 일이고, 숨기기는 청구할 것을 감춘 채 사람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공짜로 보이게 해 놓고 한참 뒤에 갑자기 결제 창과 뽑기를 꺼내는 게임은 미룬 게 아니라 숨긴 것이고, 그 순간 위에서 경고한 '돈 쓰게 하려는 함정'의 서사를 스스로 완성한다. 13장에서 표시 뒤에 사건이 있어야 한다는 정직의 원칙을 말할 텐데, 같은 윤리가 요금에도 적용된다. 낼 것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속이지 않되 내는 시점을 가치 뒤로 옮기는 것까지가 설계의 몫이고, 그 선을 넘으면 설계가 아니라 기만이다.
한 발 더 가면, 첫 화면의 목표는 요금을 0으로 만드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쿠키 클리커류가 보여주듯 첫 클릭에 쿠키부터 쥐여 주는 화면은 요금을 안 받는 정도가 아니라 먼저 지불한다. 사용자가 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내는 것이다. 게임은 오랫동안 돈을 먼저 받고 재미를 약속하는 선불에 가깝게 자랐지만, 유튜브와 숏폼은 재미부터 주고 광고로 나중에 받는 후불로 컸다. 후불제 이웃들과 같은 줄에 서서 경쟁해야 하는 첫 화면이라면, 요금이 안 보이는 정도로는 모자라고 줄 것부터 먼저 손에 쥐여 줘야 계산이 맞는다.
미룰 수 없는 요금도 있다. 약관 동의, 법정 연령 확인, 플랫폼이 요구하는 필수 권한처럼 법과 플랫폼이 첫 화면에 못 박는 항목은 설계자가 치울 수 없다. 이런 요금의 처방은 미루기가 아니라 포장이다. 흩어 놓지 말고 묶어서 한 번에, 가장 싼 포장으로 받는다. 동의 항목을 화면 셋에 나눠 세 번 멈추게 하는 대신 한 화면에 모아 한 번에 끝내고, 문구는 그 자리에서 읽히는 만큼만 남기고, 끝나자마자 게임으로 직행시킨다. 피할 수 없는 청구라면 청구서를 한 장으로 합치는 것이 그나마 값을 깎는 길이다. 그리고 잘못 청구된 요금을 돌려주는 일, 말하자면 환불에 해당하는 오류와 복구는 17장에서 따로 다룬다.
이 결정은 측정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탈 수치가 그 자체로 요금의 증거인 것은 아니어서, 이탈은 결과이고 요금은 가설이다. 이탈이 몰린 화면을 찾았으면 그 자리에서 어느 종류의 요금이 청구되고 있었는지를 일곱 유형으로 가려 읽는다. 가입 화면에서 절반이 떠난다면 개인정보 요금이 너무 일찍 붙었다는 가설을 세우고, 튜토리얼 중간에서 떠난다면 시간과 집중력 요금이 과했다는 가설을 세운 다음, 그 요금을 미루거나 깎고서 수치가 움직이는지로 가설을 확인한다. 일곱 요금은 이탈을 설명해 주는 정답표가 아니라 이탈 지점을 가려 읽는 진단 도구이고, 그렇게 쓸 때에만 정량이 우리가 어디서 너무 많이 청구하고 있었는지를 비춘다.
참고 콘텐츠
이 장의 개념이 드러나는 다른 매체의 사례.
비디오게임
- 캔디 크러시 사가의 하트 : 한창 더 하고 싶을 때 손이 묶이는 행동력 제한. 게이머에게도 미운 장치라 정 안 든 첫 사용자에겐 더 일찍 더 세게 밉다.
- 원신의 행동력(레진) : 하루 보상 활동을 묶는 상한. 첫날의 벽이라기보다 수십 시간을 들인 뒤에 체감되는 후반 마찰인데도 정착한 사용자에게조차 갑갑하다는 말이 꾸준한, '정 붙인 사람에게도 미운 장치'의 보조 증거다.
- 쿠키 클리커식 클릭형 무료 게임 : 계정도 다운로드도 튜토리얼도 없이 첫 클릭에 곧장 쿠키가 늘어, 요금을 청구하기 전에 가치를 먼저 손에 쥐여 준다. 클릭 한 번마다 즉각 피드백이 돌아오고 비용이 안 보여 사용자가 일단 발을 들인다. 받기 전에 청구하지 않고 첫 동작에 곧바로 보상을 붙이는 진입을 참조한다.
일반 앱
- 권한 요청을 '쓸 때'로 미루는 앱 : 첫 화면에서 한꺼번에 묻지 않고 그 권한이 실제로 필요한 순간에 묻는다. 드롭박스는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에 카메라를, 바벨은 말하기 연습 단계에 와서야 마이크 권한을 묻는다. 알려진 바로는 맥락에 맞춰 묻는 쪽이 첫 세션에서 무턱대고 묻는 쪽보다 허용률이 크게 높다.
- 타입폼식 '한 화면에 한 질문' 폼 : 여러 칸을 한꺼번에 보여 '오래 걸리겠다'며 떠나게 하지 않고, 한 번에 한 질문만 띄워 집중력 요금을 얇게 저민다. 알려진 바로는 한 질문씩 묻는 다단계 폼이 한 페이지에 칸을 늘어놓는 폼보다 완료율이 눈에 띄게 높다고 거론된다. '한 번에 하나만 요구한다'를 입력 화면에 그대로 옮긴 형태를 참조한다. 나머지 참고 콘텐츠는 이 글 끝의 '11장 부록'에 모아 두었다(단행본에서는 부록 D로 묶인다).
설계 노트 ▶ 직접 해보기
우리 게임의 첫 5분을 시간순으로 펼친다. 첫 화면, 로그인, 권한 요청, 튜토리얼, 첫 동작, 첫 보상, 첫 제안까지 순서대로 적는다.
각 지점마다 한 줄을 적는다. 여기서 사용자에게 청구하는 요금은 무엇인가. 일곱 요금(집중력·시간·기회비용·사회적·실패·개인정보·과금심리) 중 어느 것이 여기서 붙는가. 그리고 한 줄 더. 이 요금은 지금 꼭 청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사용자가 첫 재미를 맛본 뒤로 미룰 수 있는가.
다 적었으면 첫 재미가 도착하는 지점에 선을 긋고, 그 선 앞에 붙은 비싼 요금들에 동그라미를 친 다음, 동그라미 친 것 중 미룰 수 있는 것은 선 뒤로 옮긴다. 첫 재미가 어디에 도착해야 하는지, 그 지점 자체를 정하는 법은 20장에서 시작점과 종료점을 다루며 따로 정하니, 여기서는 지금 빌드 기준으로 가장 그럴듯한 지점에 선을 긋는다. 그게 첫 5분 요금 예산의 초안이고, 이 작업이 부록 B의 경험 요금표와 첫 5분 요금 예산안으로 자라난다.
첫 재미가 도착하기 전에 비싼 요금부터 청구하고 있었다면, 지금 그 요금을 선 뒤로 미뤄라.
한 줄 요약: 사용자는 우리가 가정한 좋은 상태로 도착하지 않는다. 산만하고, 시끄러운 곳에 있고, 다른 콘텐츠를 포기하며 왔다. 경험은 주는 것이 아니라 치르는 것이고, 첫 화면에는 집중력·시간·기회비용·사회적·실패·개인정보·과금심리라는 일곱 요금이 가장 비싸게 붙는데, 그 값은 정가가 아니라 사용자의 상태에 따라 오르내린다. 받기 전에 청구하지 않는다. 스태미나로 막고 가챠로 설레게 하는 관습은 게이머에겐 리듬이지만 처음 온 사람에겐 시간과 돈의 압박이다. 다음 장: 요금을 미루며 무엇을 먼저 줄지 정하려면, 줄 수 있는 경험이 어떤 종류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사람마다 원하는 경험이 다르다. 누구는 감각을, 누구는 소유를, 누구는 관계를 치르고 싶어 한다. 다음 장에서 콘텐츠가 주는 경험의 유형을 펼친다.
11장 부록: 참고 콘텐츠 모음
이 모음은 경험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러지는 것이라는 이 글의 논점, 곧 첫 화면이 사용자에게 집중력·시간·기회비용·사회적 부담·실패·개인정보·과금 심리라는 일곱 요금을 청구하며 그 값이 정가가 아니라 사용자의 상태에 따라 오르내린다는 논점을 게임 안팎의 사례로 넓혀 본 것이다. 사례는 매체별로 묶었고, 항목마다 끝에 '살펴볼 점'을 달아 설계자가 무엇을 관찰하면 좋은지 적었다. 읽는 요령은 하나다. 각 사례에서 무슨 요금이 언제 청구되는지, 그리고 받기 전에 청구하는지 주고 나서 청구하는지를 본다.
비디오게임
- 플래피 버드·도들 점프류의 한 손 엄지 게임 : 플래피 버드(2013)는 화면을 톡 치면 새가 한 번 떠오르는 단일 탭 조작만 두고, 도들 점프(2009)는 기기를 기울이는 동작 하나로 움직인다.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산만한 한 손 사용자를 전제로 입력을 하나로 줄여, 짧은 짬마다 '한 판만 더'가 굴러간다. 살펴볼 점: 우리 첫 동작이 한 손과 소음 속에서도 가능한지, 입력의 수가 곧 집중력 청구서의 줄 수라는 것을 본다.
- 슬롯머신의 '아쉬운 실패'와 승리 연출 : 당첨 직전에서 멈추는 니어미스, 건 돈보다 적게 돌려받았는데도 승리처럼 울리는 연출이 계속 플레이를 부추긴다고 도박 연구에서 거론된다. 가챠가 빌려 온 설렘의 원형이다. 살펴볼 점: 같은 연출이 게이머 출신에게는 설렘이지만 처음 온 사람에게는 '운과 돈으로 굴러가는 곳'이라는 경고로 읽힌다는 것, 설렘의 요금이 출신에 따라 다르게 매겨진다는 것을 본다.
- 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1-1 : 1985년작은 글 한 줄 없이 시작 직후 굼바가 길을 막게 두어, 플레이어가 복잡한 구간에 닿기 전에 점프를 스스로 익힌다. 설명 텍스트가 청구할 집중력 요금을 레벨 구조가 대신 낸다. 살펴볼 점: 가르침을 화면 구조에 심으면 요금이 거의 0이 된다는 것, 한 번에 한 동작만 가르치는 배치를 본다.
필름 실사
- 영화관의 상영 전 광고·예고편 줄 : 본편을 보러 온 사람에게 먼저 청구되는 시간 요금으로, 표값을 이미 낸 관객일수록 그 줄이 길게 느껴진다. 살펴볼 점: 이미 다른 요금을 치른 사람에게 덧붙는 청구가 더 비싸게 체감된다는 것, 우리 첫 화면의 '본편 앞 줄'이 몇 분인지 본다.
- 브레이킹 배드·로스트의 콜드 오픈 : 브레이킹 배드(2008)는 1화를 사막에서 속옷 차림으로 시신 실은 RV를 모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로스트(2004)는 추락 경위를 모른 채 정글에서 깨어나는 주인공으로 시작한다. 누가·왜를 설명하기 전에 질문부터 일으켜, 받기 전에 시간·집중력 요금을 청구하지 않는다. 살펴볼 점: 설명을 미루고 사건을 앞세우는 도입이 요금을 어떻게 후불로 돌리는지 본다.
실사 TV / 드라마
- 넷플릭스의 '인트로 건너뛰기'와 자동 다음 화 : 기다림과 반복 클릭을 요금으로 보고 시청자 손에서 덜어 낸다. 인트로 건너뛰기 버튼은 2017년 무렵 도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크레딧이 끝나면 다음 화가 자동으로 이어진다. 살펴볼 점: 한눈팔며 보는 상태를 전제로 마찰을 줄이는 설계, 다만 자동 이어 보기가 시청을 과하게 붙든다는 비판도 함께 따라온다는 것을 본다.
- 광고 기반 무료 시청 : 콘텐츠는 공짜로 보이되 광고라는 시간 요금을 치른다. 요금이 안 보일수록 사람은 일단 발을 들인다. 살펴볼 점: 보이는 요금과 체감되는 요금이 다르다는 것, 우리 첫 화면의 요금 중 무엇이 보이고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본다.
- 유튜브의 '5초 후 건너뛰기' 광고 : 광고라는 시간 요금을 통째로 강요하는 대신 5초만 정찰제로 받고 나머지는 시청자의 선택에 맡긴다. 건너뛴 광고는 광고주에게 과금되지 않는 방식과 묶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펴볼 점: 피할 수 없는 요금이라면 상한을 미리 알려 주는 것만으로 체감가가 내려간다는 것, 끝을 아는 기다림과 모르는 기다림의 차이를 본다.
음악
- 스트리밍 시대의 짧아진 곡 인트로 : 산만한 청자가 몇 초 만에 곡을 넘기기 때문에 도입의 시간 요금부터 깎는다. 알려진 바로는 1980년대 평균 20초 안팎이던 인트로가 근래 5초 안팎으로 짧아졌고, 스트리밍 곡의 4분의 1가량이 첫 5초 안에 스킵된다고 한다. 살펴볼 점: 가치를 들려주기 전에 청자가 떠나지 않도록 도입을 깎는 발상, 첫 5초가 가장 비싼 계산대라는 것을 본다.
보드게임
- 글룸헤이븐 같은 무거운 보드게임 : 2017년작의 두꺼운 규칙서는 첫 판 전에 집중력·시간 요금을 한꺼번에 청구하기 쉬운데, 그래서 규칙서가 첫 시나리오(블랙 배로)를 예시로 삼아 그 판에 필요한 규칙만 가르치고 한 사람이 진행을 이끌도록 권한다. 살펴볼 점: 전부를 미리 가르치지 않고 첫 판에 필요한 만큼만 저며 가르치는 진행, 요금의 일시불을 할부로 바꾸는 구체적 기법을 본다.
- 한 턴에 할 일을 하나씩 늘려 가는 입문형 진행 : 요구를 얇게 저며, 산만한 첫 플레이어도 한 번에 하나만 정하게 한다. 살펴볼 점: '한 번에 하나만 요구한다'는 원칙이 테이블 위에서도 같은 모양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본다.
현실 업무 절차
- 회원가입 전 둘러보기를 막는 사이트 : 좋아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개인정보 요금부터 청구한다. 받기 전에 청구하면 사람은 계산부터 한다. 살펴볼 점: 가입 장벽 앞의 이탈을 '관심 부족'이 아니라 '요금 과다'로 읽을 수 있는지 본다.
- 매장 입구의 즉시 응대 vs 먼저 둘러보게 두기 : 들어오자마자 직원이 따라붙으면 구경만 하려던 사람이 부담을 느끼고 돌아선다. 사회적 요금은 일상 공간에서도 매겨진다. 살펴볼 점: 우리 첫 화면의 인사와 알림과 말 걸기가 환대인지 부담인지, 그 판정을 사용자의 상태가 내린다는 것을 본다.
일반 앱
- 첫날부터 상품 패키지·할인 타이머가 화면을 덮는 앱 : 즐기기 전에 '여기 돈 드는 곳인가'부터 판단하게 만들어 과금 심리 요금을 매긴다. 살펴볼 점: 결제 제안이 가치 체험보다 먼저 오는 순간 신뢰 계산이 시작된다는 것을 본다.
- 게스트 결제의 '3억 달러 버튼' 일화 : UX 전문가 재러드 스풀이 전한 사례로, 한 대형 쇼핑몰이 결제 직전에 회원가입을 요구하다가 '가입 없이 계속' 버튼을 넣자 구매 완료가 크게 늘어 연 매출이 3억 달러가량 늘었다고 회자된다. 살펴볼 점: 개인정보 요금이 가장 비싸지는 지점이 결제 직전이라는 것, 같은 요금도 청구 시점을 옮기면 값이 달라진다는 것을 본다.
- 아마존의 원클릭 주문 : 배송지와 결제 수단 입력이라는 반복 요금을 한 번만 받아 저장해 두고, 그다음부터는 누름 한 번으로 주문이 끝난다. 1999년에 특허까지 받았고 그 특허는 2017년에 만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살펴볼 점: 반복 청구되던 시간·집중력 요금을 첫 한 번으로 몰아 받는 설계가 우리 화면 어디에 가능한지 본다.
기계장치 / 가전 UX
- 스마트 TV·기기의 긴 초기 설정 마법사 : 언어·지역·리모컨 페어링·와이파이·약관·계정 로그인·업데이트 순으로 줄을 세워, 쓰기도 전에 시간·집중력 요금부터 청구한다. 한 단계라도 막히면 처음으로 되돌아가 더 답답해진다. 그나마 계정 로그인 등에 '건너뛰기/나중에'를 두는 제품이 진입 요금을 낮춘다. 살펴볼 점: 미룰 수 없는 요금(필수 설정)과 미룰 수 있는 요금(계정·앱 로그인)을 가르는 눈, 청구서를 한 장으로 합치는 포장을 본다.
테마파크 / 공간 체험
- 디즈니 파크의 대기 시간 안내 : 기구 입구에 예상 대기 시간을 내걸고 줄 안에 볼거리와 사전 연출을 깔며, 표시 시간을 실제보다 약간 길게 잡아 '생각보다 빨리 탔다'는 기분을 남긴다고 회자된다. 살펴볼 점: 없앨 수 없는 시간 요금이라면 값을 미리 알리고 기다림 자체에 콘텐츠를 깔아 체감가를 낮출 수 있다는 것, 로딩 화면에 옮겨 적을 수 있는 원리를 본다.
오프라인·일상
- 코스트코의 시식 코너 : 사기 전에 먼저 맛보게 한다. 요금을 받기 전에 가치를 먼저 손에 쥐여 주는 후불의 원형이고, 시식이 해당 상품의 매출을 크게 끌어올린다고 회자된다. 살펴볼 점: 우리 첫 화면이 시식 없이 계산대부터 내밀고 있지 않은지, 우리가 먼저 줄 '한 입'이 무엇인지 본다.
문학
- 오디세이아·일리아스의 사건 한복판 시작(in medias res) : 알에서부터(ab ovo) 다 설명하지 않고 핵심 상황으로 곧장 끌어들인다. 일리아스는 트로이 전쟁의 처음이 아니라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다툼에서 시작하고, 빠진 배경은 뒤에서 회상으로 채운다. 살펴볼 점: 배경 설명을 미루고 행동부터 보여 주는 도입의 원형, 수천 년 전 서사시가 이미 요금을 후불로 받았다는 것을 본다.
만화
- 주간 소년점프의 첫 화 승부 : 독자 앙케트가 데뷔 직후부터 순위를 매겨, 첫 몇 화 안에 독자를 못 붙들면 이른 연재 종료로 이어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 편집부와 작가는 첫 화에 가장 큰 힘을 싣는다. 살펴볼 점: 처음 온 독자가 가장 비싼 첫인상 요금을 매기는 곳이 첫 화라는 것, 첫 화에 무엇을 보여 주고 무엇을 미루는지 본다.